이름 없는 곳
감동환이 사진 찍고 김서경이 디자인한 De Commelin(2019)은 네 쪽 짜리 책이다. 한 장의 종이를 반으로 접어 네 개의 면을 만듦으로써 이루진 것이다. 첫 면에는 사진이 한 장 있다. 햇살이 좋은 어느 낮, 두 언어로 ‘빵집’(bakkerij مخبزة)이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달린 가게 앞에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고, 그 옆에 한 노년의 남자가 서 있는 장면이다. 장을 넘기면 나타나는 두 번째 면은 텅 비어 있다. 그 오른편의 세 번째 면에는 첫 면에 있던 사진과 거의 같은 사진이 놓여 있다. 다만 이 사진에는 노년의 남자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면에는 ISBN 번호와 에디션 번호가 써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책이라고 부르기 주저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책의 모습에 비하자면 더없이 연약해 보이니까. 하지만 De Commelin은 그 간소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책이라고 주장하는 요소로 가득하다. 우선, ISBN을 발급받았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책으로서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어딘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이 책의 세세한 발행 정보가 다른 여타의 책들과 함께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De Commelin은 독립된 지면 공간이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중 둘은 내용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표지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두께 없는 얇은 선일 뿐이지만 책등의 기능을 하는 부분도 있다. 형식적으로도 이것은 오늘날 책이라고 부르는 사물들과 충분히 닮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보다도 책인 이유는 무한한 이야기를 품은 사물이기 때문이다. 코멜린 거리에 자리한 이름 없는 빵집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단 두 장의 사진의 배치로 끊임없이 흐른다. 네덜란드어 ‘bakkerij’과 함께 적힌 ‘مخبزة’는 마그레브 지역에서 쓰는 단어이니 이 빵집의 주인은 아랍의 서쪽에서 온 이민자일 가능성이 크다. 첫 면에 등장했다가 세 번째 면에서 홀연히 사라진 남자는 빵집의 주인이거나 손님일수도 있지만 또 빵집과는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단 두 장의 사진은 이미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엄연히 책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한 비어 있는 두 번째 면이 그 이야기의 무한함을 가능하게 한다. 두 이미지 사이에 놓인, 보통은 가시적인 것들의 봉합으로 없는 듯 여겨지는 잠재성의 공간. 이 공간은 De Commelin이라는 책의 이야기에서 무엇보다도 결정적이고,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수수께끼를 통해 책은 강렬함을 가지게 된다. 이름 없는 빵집의 이야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름 없는 자리가 필요했던 것일까?
하지만 감동환이 늘 이름 없는 자리를 만들고 사물을 의문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어떤 이름들의 자리를 만들곤 한다. 나는 한국과 대만의 언더그라운드 작업자들이 모인 한 마켓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감동환 역시 자신의 출판물을 가지고 여기에 참여했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서 ‘Names of Waters’라는 제목의 작은 바이닐 한 장을 구입했다. 이 음반과 함께 받은 포스터에는 파란색 글씨로 수천 개의 단어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이는 감동환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수집한 전 세계의 물의 이름이라고 했다. 음반에 수록된 것은 가수 이랑이 감동환이 수집한 물의 이름들을 노랫말 삼아 나직이 읊조리는 11분 47초 길이의 트랙이었다. 나는 종종 노래를 듣고 포스터를 펼쳐 보면서 그가 왜 이렇게 많은 이름들을 모으고, 써 내려가고, 노래로 만들어보았을까 궁금해했다. 음반의 커버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물의 맛들이 아주 미세하게 다르면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물의 이름을 수집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이름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물’이라는 전체가 사실은 얼마나 많이 쪼개져 있는지, 그 차이들이 어떻게 세계를 구성하는지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 방대한 이름의 목록은 어느덧 모순되게도 이름이 희미해지는 자리가 되어간다.
그의 최근 작업도 이름에 관여하는 일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의 기획전 말하는 머리들(2025)은 “다양한 이유에서 보이지 않거나 쉽게 드러나지 않는 움직임에 주목”하는 기획이었고, 감동환은 여기에 이름들(2025)라는 작업으로 참여했다. 이름들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이후에 한 번도 전시되지 않은, 한 번도 수장고를 떠난 적이 없는 모든 작품의 이름들을 인쇄한 작업”이다. 관객은 전시장 벽면에 부착된 작업에 관한 짧은 소개문과 지시문을 읽고, 거기에 적힌 대로 전시장의 직원에게 이름을 받기를 요청하면, 직원은 미술관에 소장되었지만 한번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작품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든 봉투를 받게 된다. 나는 한동안 감동환이 왜 우리에게 이름을 건네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거기에 이름이 아니라 작품의 이미지가 있었다면 우리는 보다 더 즉각적으로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작품의 실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고, 드러난 적 없던 것이 드러나는 데에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감동환은 이름을 통해 그 사물을 어둠으로부터 꺼내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물로 가게끔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름들은 우리를 이름 없는 곳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감동환에게 이름이란 존재를 특정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물이 자리를 찾아 배회하게 만드는 통로이다.
오래 전, 내가 처음 접했던 감동환의 작업은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2014, 테넌트 북스)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어딘가에서 예상치 못하게 이 책을 종종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어떻게 그 책을 보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유니버셜 스튜디오 재팬은 한 소녀가 일본 오사카의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긴 사진집이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소녀의 얼굴이 인상적이기도 하고, 사진들이 구성하는 여행의 서사가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에 보는 즐거움이 있다. 이 작업이 동묘 재활용품 가게에서 구입한 1,500여대의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현상한 사진으로 만들어진 ‘들어있던 필름’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그 책을 떠올릴 때마다 묘한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이 사진들은 어떠한 이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이 책의 이름이 독자를 데려가는 곳이 다름 아닌 이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