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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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타의 학문이나 지식 체계가 아닌 미술의 범주를 활동의 영역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미술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지적인 선택들이 집적된 인공적인 체계, 세계에 대한 반응이자 세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개입하기 위한 방식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가시화(물질화)되는 것들의 총체이기에, 이 체계를 이해하는 일, 혹은 (이것이 너무도 막연한 것이라면)이 체계 안에서 집적된 사물을 이해하는 일은 당대의 생산 조건을 추측하기 위한 근거가 되며, 가치는 이 추측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해라는 것은 사실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아득히 먼 행성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숙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가치란 현재의 시공간에서는 확정될 수 없으며 언제나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수많은 가능한 결론이 사변적 상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그 중 하나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것은 논증이다. 이 모든 일은 우주 저편에 또 다른 은하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이다.
비평이 운동이라면, 그것은 사물이 ‘무엇’이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움직임을 측정해야 할 것이다.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눈앞에 던져졌을 때, 혹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다르게 읽힐 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대상을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는 행위에서 비평의 운동은 시작된다. 꼼꼼히 살펴보고 번역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지만,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앎이 재배치될 때, 그 일련의 총체적 과정을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간 비틀어 말해보자면, 비평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새로운 앎이라는 결론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이르는 모든 세부적인 절차와 선택과 연결의 운동성일 것이다.
비평에서 마지막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은 작품이다. 예술 비평은 작품에서 시작하는 나선형의 운동이고, 반대로 작품을 향해 육박하는 충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도화된 예술계에서 비평이 중요하게 자리 잡는 이유는 작품에 대한 가치 서술과 이에 대한 반박을 유도하는 사회적 과정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이러한 사회적 과정 없이 유통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러한 작품은 대개 관습적인 합의에 기대어 있어서 불편함 없이 수용될 수 있거나, 작품 외적인 요인으로 상징성을 획득한 (혹은 이양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비평은 전자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밖에 없고, 후자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매우 적은 다른 예가 있다면 직관적으로 보편적 의식에 파고 들지만 비평 마저도 그것을 가시화하고 구조화 할 도리가 없어 유예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비평은 그러한 시차적 사물을 현재에 마주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바쁘다.
비평이 모종의 운동이라고 한다면, 비평의 위기는 운동하지 않는 비평 즉 비평인 척 명령하는 형상들과 관련한다. 비평이 운동하는 제도에 부조리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비평 자체의 문제라고도 할 수는 없다. 제도가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비평으로 오해된 힘들이 권력화 한 장소일 것이다. 비평은 비타협적인 길을 내기 위한 운동이지 무언가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의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번역해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어 텍스트의 외연을 한없이 확장시키는 유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때, 비평은 풍요로운 지형을 개척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겠다.
비평은 하나의 작품이 픽션임을 증언하는 일이다. 때문에 비평은 언제나 일종의 이야기를 생성하는 일이고, 따라서 비평은 그 스스로가 또한 픽션이어야 하는 이중 구속의 상태에 있다. 픽션은 무엇인가? 손바닥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손바닥의 앞면을 볼 때 손등이 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직접 볼 수는 없다.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직접 확인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손바닥의 측면에선 손등이 픽션이고 손등의 측면에선 손바닥이 픽션이다. 사실 픽션이란 이 상황의 총체성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평은 손바닥에서 손등을 추측하거나 손등에서 손바닥을 추측하는 일이기도 하고, 손바닥이나 손등을 뒤집어볼 수 있음에 대해 제안하는 일이다.
픽션에 관한 한 대담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픽션이 유의미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사물과 사물의 위치에 대한 통상적 이해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사물이 어떻게 꺼슬꺼슬한 세계의 잔여로 남는지, 그것이 어떻게 모종의 작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불현듯 환기시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의 경우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적인 측면은 모든 작품 자체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픽션으로 드러나게 되는 실제적인 조건은 분명히 있다고 보는데, 결국은 그 조건에 대한 이해는 매체와 형식에 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1 나는 픽션이 시작하는 곳에는 매체를 재발명하고 형식을 재배치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비평이란 형식과 매체의 비틀림에서 시작된 파동을 따라가며 작품이라고 하는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픽션이 어떻게 세계에 틈입하게 되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형식과 매체는 일종의 유산으로써 변형되고 확장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형식 실험과 매체의 재발명은 미술이 당대의 반영으로만 그치는 것에 머물지 않는 자율성을 위한 숨구멍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작품에 결속된 형식은 내적 형식과 그것의 외부의 형식 둘 모두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중의 형식 안에서 매체는 어떻게 유동하며, 이 움직임이 어떤 픽션으로 기능하는가? 질문은 결국 하나의 예술 실천이 어떤 전술을 구사하는가에 대해 파악하기를 요청한다. 때문에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시대의 감각을 반영한다거나 시대의 시각장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스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작품에서 멀어진다. 혹은 이 이중의 형식을 면밀히 따져보았을 때, 모호한 수사적 담론에 가려져 있던 진부함이 제 몸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이는 미술계가 젊은 작가들을 논의하는 방식에 대한 한계에서 기인한 생각인데, 단순히 시대의 새로운 매체적 감각이나 세대적 경험이 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성급하게 전환되어 논의를 닫아버리면서 진정 중요한 예술적 효과와 기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것이 과도하게 미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경계한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이 미학적 규준이 된다면, 그것은 다음 세대가 출현하면서 즉각적으로 폐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꼴이 된다. 중요한 것은 당대에 갱신된 형식의 조건과 매체의 사용을 통해 생성된 픽션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분명 형식주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변증법의 질서 아래에서 판별할 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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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창작물 중 하나는 우오토의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문학동네)다. 일본에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약 2년간 연재된 만화로, 8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한국에서는 지난해 번역 출판을 마쳤다. 가볍게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15세기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천동설이 지배하던 세계, 즉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회전한다는 믿음이 종교와 결속되어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시기에 등장한 지동설을 믿는 사람들의 싸움에 관한 픽션이다. 진실을 탐색하고 그것을 세상에 출판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고, 그리하여 이 드라마는 진실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한 세계 안에서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작업인지를 환기시킨다. 더불어 진실을 다루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일종의 숙명이자 매혹이라는 점 또한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 작품이 내게 인상적으로 남았던 이유는 그 자체로 내가 비평이라고 이르는 행위 혹은 작업을 은유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기억에 남는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지구의 궤도 운동에서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움직임을 포착한 관측자가 그로부터 세계를 구성하는 믿음에 대해 의심을 키워 나가게 되는 장면이다. 이미 알던 지식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꺾인 궤도를 발견한 관찰로부터 모든 의심과 다른 사유가 시작하는 것이다. 진실은 관찰로부터 싹틔운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인쇄기를 지키는 장면이다. 진실을 전파하기 위한 생산 수단. 견고한 믿음과 앎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 마지막은 욜렌타와 오크지 두 주인공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운동한다는 위험한 추측이 담긴 책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었지만, 욜렌타가 뛰어난 학자로서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면 오지크는 당대의 수많은 일반적인 사람이 그러했듯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오지크는 문득 글을 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인지 욜렌타에게 묻는다. 욜렌타는 당황하고 주저하다가, 그건 일종의 “기적”같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책을 펴고 글을 읽으면 수천년 전의 사람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면서 말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글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거의 모두가 글자를 읽는 시대다. 읽기가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읽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는 거의 매 순간 잊힌다. 글자가 소환하는 이미지, 글자로 인해 산출되는 허구는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은 사실 신비 그 자체일수밖에 없다. 여기서 내가 글자가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뻔한 사실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강렬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게 마치 기적 같다는 그 말이 전달하는 것은 책이라는 사물의 강렬함이다. 책과 마주친 최초의 인간은 어쩔 도리 없이 그 강렬함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는 책을 강렬함의 사물로 여기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책이 강렬함을 가지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시대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강렬함’에 대해서다. 강렬함이라는 용어가 상념의 구심점이 된 건 조효원의 다음 책(문학과지성사, 2014)에 등장하는 한 구절 때문이었다. “… 이렇게 온 몸으로 보는 행위야 말로 진정으로 자신과 세계를 ‘알아보는’ 행위인 것이다. 오직 이러한 행위들로 쓰인 책만이 최고의 밀도를 간직한 강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뒤이어 조효원은 카프카가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다.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게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러고 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는 강렬함이다.”
문제는 강렬함이다. 강렬함이 무엇인지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것이 내가 작품이라고 하는 사물을 좇는 이유였다는 것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작품이 강렬하다면 그것은 저마다의 이유로 강렬할 것이고, 저마다의 이유로 신비로운 사물을 언어로 재구성하기를 시도하는 것이 바로 예술 비평의 근원적인 충동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작품의 강렬함은 비평의 내재적인 조건이다. 한편 이런 생각은 매우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미술에 관한 비평에서 강렬함은 더는 조건이 되지도, 동기가 되지도 않는다. 강렬함과 무관하더라도 작품은 역사적으로, 주제적으로 설명되고 논의된다. 나는 이러한 행위가 무척 해부학적인 활동이라고 느끼는데, 그것과 어긋나 있는 강렬함과 얽힌 비평은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강렬함은 신비와 관련 있고 신비를 보존하는 건 문학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오늘날 담론의 주요한 경향이자 일반적인 텍스트이고 후자는 점점 잊히고 약화하는 것이다.
나의 비평 활동 전반에서 내가 놓지 못했던 용어가 있다면 ‘픽션’이다. 그리고 그 활동의 시간에서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픽션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픽션이 어떻게 강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픽션이 도래해야 하는가였다. 그리고 픽션의 강렬함이 문제가 되는 작업들의 내부를 상상하고 또 그것이 강렬하다는 것에 내기를 거는 작업이 글쓰기였다. 동시에, 강렬함을 찾아 다니는 사람으로서 나는 강렬함을 품은 사물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책은 언제나 픽션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출판사를 통해 책을 만들었고, 나선이라는 운동성의 이름을 빌어 끊임없이 강렬함을 상상해야만 했다. 언젠가 나는 나선의 의미를 일링크스라고 하는 놀이의 한 양식과 관련하여 설명한 적이 있었지만, 이를 강렬함의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강렬함은 강도와 밀접하게 관련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강도의 문제와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규명하는 것은 남은 과제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강렬한 사물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현실이다.
몇 년 전, 유지원 큐레이터가 미술 작가들이 도록을 명함처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게 어딘가의 토크에서 들은 것인지, 그가 어딘가에 쓴 글에서 읽은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미술과 관련한 여러 다양한 성격의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상당히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윤원화 비평가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진행 된 심포지엄 기록하는 미술관, 기억하는 미래에서 ‘아카이브 픽션: 시간을 분기시키기’라는 제목으로 동시대 예술에서 아카이브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힘의 방향성에 대해서 섬세하게 살핀 적이 있다. 그는 “하나의 ‘성과물’로서의 예술 작품이 유통되는 과정에서 예술은 여러 가지 형태의 기록물, 정보의 집합, 데이터의 흐름으로 변형된다.”고 말하며 아카이브라는 존재로 인해 창작이 일종의 자기증명과 역사화라는 폐쇄회로에 갇히게 되는 상황, 그리고 창작의 시간보다 데이터가 더 큰 지위를 가지는 상황에 대해서 묘사했다. 이들의 진술을 바꾸어서 이해해 보면, 미술에서 책이라는 것은 이제 강렬함의 생산과는 전혀 무관한 장소가 된 현실이 보인다. 흘러 넘치는 것은 모방의 그릇이 된 물건이다.
작가 이주요는 2000년대의 미술을 회고하는 한 대담에서, 자신의 2005년 작품 Two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제 작품을 누군가가 이미 있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서 그 범주 안에서 이야기하는 게 굉장히 싫었다. 일단 불합리하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 그 특정한 것만이 선택되고 사라지는데, 그런 식의 기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저는 사라지는 것에 집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강력한 개인이 되자고, 스스로 독립적인 세계인이 되자는 생각을 했었다. 예를 들면 Two라는 작품을 했는데 두 사람이 몸을 서로 마사지하듯 닿고 연결되는 작품이다. 주변 작가들이 하도 많이 아프길래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아픈 곳을 기록하면서 3년 정도에 걸쳐 완성한 책이다.”2 Two는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흐르는 미술 속에서 작품이 전시 공간을 벗어나 책이라는 공간에 자리 잡은 선구적인 작품 중 하나인데, 이주요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면 그가 미술의 매체로서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그저 작품의 대안적인 장소를 모색한 결과가 아니라 세계 안에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추동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를 깨부수고 거기서부터 자리를 다시 만들기 위한 선택.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던 건 내가 픽션-툴: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2018, 인사미술공간)를 만들면서 였다. 이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예술 출판에 대한 아카이브 전시로, 이 시기 예술 출판을 일종의 허구 생산 도구로서 이해해보려는 시도였다. 나는 이때부터 ‘아티스트 북’이라는 절충적이고 타협적인 용어와 개념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티스트 북이라고 이르는 사물에 대해 어떠한 것도 말해주지 않는 용어였기 때문이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어떤 책이 공공연히 미술가로 여겨지는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거나 미술관이라는 제도와 관련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어떤 책이 왜 불가해한 방식으로 강렬한가 였고 미술 출판의 가능성은 바로 그 강렬함으로 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 전시는 아티스트 북의 집합이 아니라 강렬함, 그러니까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생산하기보다는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혀 보고기를 갈망했던 책-실천들의 장소였다. 그리고 나는 그 실천이 결코 단일하지 않음을, 강렬한 책은 저마다의 이유로 강렬함을 주장하고 싶었다.
당시 전시를 위해 리서치를 하던 중 AC퍼블리싱에 대해 알게 됐다. AC퍼블리싱은 미술가 여다함과 윤사비, 그리고 피진콜렉티브의 일원이었던 프레데릭 미숑이 2009년 설립한 콜렉티브였고, 더는 그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의 2013년 작업 Timber!는 구성원들이 각자 인쇄기를 돌려 만든 이미지를 A4, A5, A6 사이즈로 재단해 만든 책으로, 기계가 도입된 생산과 산업적 생산 규격을 따르면서도 이미지의 우연적인 만남을 산출하는 실험이었다. 이 책에 관한 자료를 윤사비 작가에게 요청했었는데, 그는 엄청난 양의 인쇄 작업물과 함께 “A BOOK MUST BE THE AXE FOR THE FROZEN SEA WITHIN US”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를 함께 보내주었다. AC 퍼블리싱이 전시를 할 때마다 공간에 걸어둔다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당시의 나로서는 이 은유가 그들의 작업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책과 출판과 어떻게 관련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는 무엇인지, 책은 어떻게 그것을 깨는 도구가 되는지 말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이 액자에 적힌 문구와 이것을 늘 어딘가에 걸어두었던 마음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내가 픽션-툴: 아티스트 퍼블리싱과 능동적 아카이브라는 미술가의 책-실천에 관한 전시 혹은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보고 싶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김범의 변신술(1997), 김나영의 전설(1997-1999), 공성훈의 말 못할 속사정 전모(1993), 노재운의 비말라키넷(2001-) 같은 작업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렬함을 품는 것이 미술의 문제였고 세계를 부수고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을 밀고 나가보는 것에 열중했던, 내가 겪지 못한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이해해 보고싶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내밀하게는, 강렬함을 다시 미술의 문제로 되돌리고 싶었고 또 텅 빈 공간, 다른 장소에 대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것이 미술이 책을 끊임없이 재발명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북페어에서 리슨투더시티의 신간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과 신도시의 따라코믹스 시리즈 3탄 ‘가짜스머프’를 샀다. 이들의 출판물 또한 전시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여전히 출판을 한다.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은 청계천, 을지로 일대에서 쇠를 다루고 기계를 만들어온 제조업 기술자 38명의 인터뷰가 담긴 책이다. 2018년 시작한 따라코믹스 시리즈는 신도시가 만화 한 편을 선정하고 그것을 동료 작가들에게 그려줄 것은 요청하는 연속 기획물이다. 이들의 출판은 주제도, 관심사, 감수성도 다르고 책을 만드는 기술도, 책에 대한 개념도, 그리고 책에 기대하는 기능도 전혀 다르지만, 나는 이들의 실천에서 언제나 공동체의 감각을 전달받곤 한다. 여기서의 강렬함은 세계를 부수는 일과 관련하기보다는 세계를 짓고 연결하는 일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 같다. 실상 그것이 그렇게 구분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들에서 ‘다음’을 느낀다. 이들은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에는 언제나 다음이 있고, 다음의 다음이 있고, 그렇게 길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다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강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