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해방된 연주자, 다른 것에 의한 음악: 권병준에 대한 노트

월간미술 2019년 9월호에 수록.

 

나의 할머니는 피아노를 가르치셨다.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면 동네 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가서 30분씩 돌아가며 앉아 피아노를 치곤했다. 나는 어렵고 멋있는 곡을 치고 싶은 욕심은 많았지만 똑같은 연습곡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것은 못견뎌했다. 다섯 번 칠 것을 세 번 치고 세 번 칠 것을 두 번 쳤고 남는 연습 시간은 온몸을 베베 꼬으며 보냈다. 자주 연습을 도망가곤 해서 할머니는 형을 보내 나를 찾아오게 하곤 했다. 나는 점점 더 피아노 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됐고, 악기 다루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고등학교 때에는 기타 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기술을 연마하기에는 결연함이나 열정이 부족했고, 음악적 표현보다는 글쓰기에 더 관심이 갔다. 무한한 선택과 배치가 가능한 글쓰기, 특히 문체에 매혹되었다. 음악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조금 더 재미있게 살았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금의 나는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기는커녕 기초적인 수준의 악보도 잘 볼 줄 모른다. 음악은 내가 가장 모르고 또 못하는 것 중 하나가 되었는데,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내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전문적인 영역이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친구들을 따라 서울의 즉흥음악 공연을 찾아 다녔을 때 나는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열패감을 도려내 주었다. 소리가 음악이 되는 새로운 규준, 대안적 시스템의 구성 방법으로서의 음악, 현상학적 체험을 지향하는 미학적 입장을 경험한 후 내게 음악은 회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주체적인 재개념화에 뒤따르는 선택의 문제로, 향유의 문제로, 얼마나 밀어붙일지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동시대 예술은 영역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개념화하고 재규정하는 운동성 속에 놓여 있으며, 결국 비평의 역할 중 하나는 작가가, 작품이 혹은 그것들이 놓여있는 체계가 예술 자체를 어떻게 개념화하고 수행하는지에 대해서 추적하는 일일 것이다.

최근 밴드음악과 노이즈 즉흥음악을 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소닉픽션(sonic fiction)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유령과 같은 비가시적 세계를 지시하기 위해 음악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그 지시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한 음악적 요소의 배치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같은 말이겠지만, 요소의 재배치를 통해 음악의 개념을 재발명하여 유령과 같은 비가시적 세계를 지시해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에서 우리는 권병준 작가를 초대해 그의 지난 시간 동안의 음악적 실천에 대해 얘기를 듣고자 했다. 밴드활동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새로운 소리를 찾아 나가며 음악의 개념을 확장시키는 그의 예술적 실천이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 의미에 대해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새로운 악기 만들기가 논의의 중심이었다.

사전 미팅을 위해 권병준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어디에서나 볼법한 보급형 헤드폰을 매만지며 고군분투 중이었다. 그 헤드폰은 그가 발명중인 새로운 악기 중 하나였다. 이 헤드폰은 다른 헤드폰과 반응하는 일종의 인터랙션 악기였는데, 넒은 공간에서 다수의 참여자가 헤드폰을 쓰고 돌아다니며 다른 참여자와 조우했을 때 서로의 헤드폰에서 나오는 소리가 믹싱되며 새로운 소리를 만든다. 최대 3명까지 믹싱이 된다는데, 작가는 그 악기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기술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이 헤드폰은 그가 만드는 악기들의 특성에 대해, 그리고 그의 음악적 실천의 결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권병준이 만든 악기를 세세히 살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헤드폰처럼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또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악기는 완전히 새롭게 발명된 형태를 가지지도, 완전히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물에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관습적인 인터페이스를 매개로(누구라도 헤드폰은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그 사물에 새로이 부여한 전자적 장치를 통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음악의 청취자 혹은 체험자는 익숙한 사물에서 그 인터페이스에 따라 새로운 음향과 새로운 청취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그가 발명하여 여러 공연에서 선보인 ‘하이브리드 피아노’는 피아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현악기의 소리를 낸다. ‘하이브리드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가진 역사적 유산, 즉 고전적인 연주부터 망치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백남준까지 그 악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어 온 역사 속의 여백을 찬찬히 되짚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가 만드는 새로운 악기는 기존의 사물이나 체계와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해방적 상태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감각을 기반으로 음악의 개념을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느린 발걸음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음악은 기계 장치나 사물의 기본적인 하드웨어를 근간으로 삼고 거기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유물론적인 즉흥, 연주자와 청취자가 동일한 위계에 놓이길 바라는 아나키적 음악이 아니라 연주자에게 음악의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부여하는 것, 일종의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일이다. 유물론적 즉흥이 탈-이데올로기 적이라면, 권병준의 악기는 대안적 이데올로기다. 전자가 미적 경험 자체를 끊임없이 환원시키려 한다면, 후자는 미적 경험을 매개로 한다.

새로운 인터페이스는 전에 없던 소리를 만들어 내고 음악의 개념을 재구성하면서, 동시에 그 인터페이스를 위한 새로운 몸짓을 상상한다. 사물과 기계에 주어진 새로운 몸짓은 그 사물과 기계에 오래도록 스며 있던 관습을 역으로 드러내고 그 관습으로부터 연주자를 해방시킨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만드는 악기는 연주자로 하여금 아주 약한 몸짓, 누구나 가능하고 쉽게 수행할 수 있는 그러한 몸짓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음악의 유토피아적 보편주의를 향한 권병준 자기 자신의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음악에 있어서 연주자의 현존적 몸짓은 청취자보다 더 큰 무게중심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청취자를 등한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청취자는 권병준에게 있어서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 자체다. 그의 음악은 연주자를 해방시키는 것임과 동시에 청취자에게 소리의 세계라는 새로운 장을 펼쳐놓는 일이다. 이미지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의미작용의 언어이고 지배적인 감각이라면, 권병준이 오랜 시간 동안 음악을 해 온 것은 소리와 청취라는 대안적 언어와 감각으로 세계를 다시 지각하고 재구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권병준이 쓴 무기와 악기라는 짧은 에세이가 있다. 이 글은 그가 네덜란드에 있는 전자악기 개발 연구소인 스타임(STEIM)에 재직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살상의 기술이 오락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에 대한 단상을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한 크고 작은 폭력의 기억과 겹쳐 놓는다. 무기와 악기. 악기를 만드는 것인지 무기를 만드는 것인지, 악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가 만드는 것이 악기인지 무기인지. 이 글을 읽고 나면, 권병준에게 악기를 만든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그에게 악기는 절박하고 시급한 요청이고 근본적으로 부조리한 힘에 대한 대응의 방식이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내 능력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을 다 지워 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그 무엇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