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말의 노래, 몸짓과 빛, 기다리는 풍경

세화 미디어아트 프로젝트 유비호: 찰라찰라(세화미술관, 2019) 도록에 수록.

 

유비호가 자신이 발 디딘 세계에 대해 이해하는 바는 어쩌면 단순하다. 작가는 종종 오르페우스 신화를 통해 동시대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우리가 놓인 세계는 길고 긴 지하 세계에서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데려와야 하는 어둠 속의 음유시인 오르페우스의 처지와 같다. 물의 님프였던 에우리디케는 산책하는 와중 자신을 따라오는 아폴론을 피해 달아나다 뱀에 물려 죽는다. 비탄에 잠겨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 리라의 대가였던 오르페우스는 그의 음악으로 지하 세계의 신들을 감동시키고,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데스는 지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주의를 오르페우스에게 주지만, 결국 에우리디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는 영영 그녀를 잃고 만다.

유비호는 신화 속에서 오르페우스가 처한 상황, 아득히 어둡고 절망적인 지하세계에서 상실감으로 가득한 한발 한발을 내딛으며 가능한지조차 모를 만남과 탈주의 시간을 상상해야 하는,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를 지상으로의 귀환, 빛의 세계로의 이주를 위해 하염없이 눈을 감아야 하는 그런 상황을 우리 모두가 놓인 시대의 모습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유비호에게 있어서 일종의 상징과 비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작업이 그와 같은 상징을 상징으로서 표현하지 않고 일종의 문학적인 것으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적이라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를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근본적인 유령성을 뜻하는 것으로, 기호적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경계의 자리를 더듬는 것, 아감벤의 용어에 따라 태초에 시가 수행했던 행간의 자리를 되찾는 비평적인 힘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유비호가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 힘을 작동시키기 위한 구조는 정확히 오르페우스의 신화라고 하는 언어 체계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를 감화시키고 전복시키는 것으로서의 말과 노래, 회복해야 할 것으로서의 지상의 빛,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뒷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작가가 작업을 이어온 시간 안에서 그 변곡점들에 대해서 톺아보고자 할 때,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징적인 것으로부터 문학적인 것으로의 전환이다. 작품의 형식이나 분위기가 바뀐 것은 근본적인 방법의 변화에 수반되는 것이고 표면적인 가시성일 뿐이다. 또 작가의 개인적인 심경의 변화나 사적인 경험은 이러한 전환에 부연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비평의 시선이 진정으로 응시해야 할 곳은 이러한 표면과 부차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가진 힘과 그것이 놓인 위치, 그리고 놓인 방식이며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유비호의 작업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 잊힌 존재들을 찾아내고, 기억하고자 한다. 어둠속에 잠긴 미약한 존재들에게 빛이 깃드는 몸짓을 부여하고, 그 빛의 덩어리들을 좇아 하염없이 다가가는 것. 그리고 그런 어둠을 향해 그는 말을 읊조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 말과 노래는 동굴 안에 울려 펴지는 바깥의 목소리이다. 이야기는, 목소리를 통해 발화된 구체성은 어둠 속에서 어둠을 가르고 그것에 맞선다. 그리고 그는 미래라는 진부한 시간, 하지만 이제는 마음에 담기조차 아득한 그런 시간을 상상한다. 모든 것의 앞에 서서 뒷모습만을 보여줄 뿐인 안내자 즉 얼굴 없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찾아 나가는 형상을 통해서 말이다.

먼저 그의 말들에 대해 살펴보자. 예언가의 말(2018)은 스크린의 화면을 한 남자의 얼굴로 가득 채운다. 그 얼굴은 가로로 누워 있고, 목 아랫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입만을 움직이며 감정을 격앙시키며 대사를 읊조린다. “분쟁, 분열, 전쟁, 살인, 비참, 불행, 비극, 고통, 고뇌, 의심, 거짓, 사기, 복수, 원망, 후회, 망각”은 “온기를 탈취하는 이기심과 증오”이며, “파멸을 잉태하는 밤과 어둠”에 속한다. 반면 “그리움, 기억, 기다림, 소망 부활”은 “희망의 단편”, “마음속에 박혀있는 빛의 파편”이다. 이와 같은 대조는 한데 섞여 들어가며 어둠속을 더듬는 시간을 구조화한다. 즉 어둠과 빛은 서로에 상관하는 것으로 이 문장은 어떤 현실의 리얼리티를 지시한다. “빛을 삼키는 깊은 어둠의 터널” 속에서 “곧 다가올 빛 조각을 찾길 기대하며, 절망의 걸음과 희망의 걸음을 번갈아 가며”, 그렇게 “어둠을 지나치는” 그런 시간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장 미래의 시간으로 나아간다. “삶, 빛, 향기로움, 대지의 사랑”, “빛을 찾아 짙은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자”고 말하며,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주기를 요청하며, “혼돈, 분열의 어둠을 밀어내어 햇살 속으로 들어가자”라고 말하며. 그가 사용하는 명확한 단어들은 세계를 분명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어둠의 세계와 그것이 아닌 바깥의 세계로 말이다.

이처럼 전지적인 것으로서 들려주는 바깥의 목소리는 바람을 위한 노래(2015)에서는 정가 형식을 빌어 울린다. 영상은 폐허가 되고 버려진 장소들, 남겨지거나 떠날 수밖에 없어서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스산한 공간을 보여주며, 그 위로 깊은 울림과 느린 떨림을 지닌 목소리가 얹힌다. 바로 그러한 장소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형상화한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2015)와 짝패를 이루며 말이다. 이 짝패가 보여주는 사실은 유비호가 바라보는 소외된 이들에게 주어진 장소는 없으며 그들의 장소는 텅 빈 곳이거나 사잇길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사잇길을 끊임없이 유동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노래의 목소리는 정가라는 노래 형식의 독특함이라고 할 수 있을 언어를 통한 의미전달의 불명확함을 통해 정동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 말은 즉,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화면 안에 담긴 장소에 울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으로서의 우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잇길을 유동하는 지시할 수 없는 존재들은 오직 어떤 효과로서만 드러나는데, 그 지시의 효과 속에서 우리는 소리가 이끌어내는 문학적 울림과 공명한다. 그리하여 유비호가 만드는 오디오-비주얼의 효과란 의미의 전달이나 이야기의 구성이라기보다는 그 말과 리듬, 소리가 지닌 정동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순되게도, 그가 직접 쓴 노랫말들, 너무나도 명징한 단어와 기호 체계의 표상들이 지시할 수 없는 그런 경계에 선 어떤 장소에 놓인 것들을 떨리게 만든다.

유비호는 분명 그러한 경계의 장소에 대해 인지하는 감각을 가진다. 그것은 어쩌면 사회의 어두운 곳을, 소외되고 비가시적인 존재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의 당연한 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음유시가: 가회동(2011)이라는 작업을 통해 뇌막염에 걸린 중환자 X가 사라진 이야기를 노래한 것처럼 말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X는 단지 거동이 불편한 환자로 남는 것이 아니라 뒤이어 사회적 이슈가 된 절도범과 이어지는 허구가 된다. 말하자면, 그가 말과 노래를 통해 다루는 존재들은 가장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성을 담보하지만 그의 말과 노래는 그들을 현실과 아득히 먼, 무한한 거리를 지닌 허구로 만든다. 즉 유비호는 그들을 사유함에 있어서 늘 텅 빈 공간 안에서만, 사잇길의 존재론으로서 다룬다. 그 사잇길을 유유히 흐르는 것으로서의 바람, 그들을 연결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공기의 유동성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심상이자 방법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2014년 광주에서 기획한 퍼포먼스 음유시가: 광주는 직접 작사한 노래 바람과 은하수와 햇볕과 땅이 전하는 미미한 순간의 노래를 한 퍼포머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요한 기념비들을 돌아 걸으며 노래한 작업이었다. 이 노래에서 바람은 무언가와 무언가의 사이를 흘러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멀리 산 너머 고여 있는 바람, 산 정상을 넘는 바람, 급격히 산비탈을 내려오는 바람, 소나무 숲 사이를 달리는 바람, 풀숲을 달리는 바람, 버드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농가와 농부를 지나치는 바람, 보리밭을 지나치는 바람, 도시에 진입하여 다층 건물을 지나는 바람, 골목길을 지나치는 바람, 차도를 달리는 차량들 사이를 달리는 바람, 광장에 다다르어 광장을 맴도는 바람, 광장의 중심, 분수대에 이른 바람”. 그리고 이 바람은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불러낸다. 그 장소에 깃든, 그리고 우리 사회에 남겨진 공동의 기억 말이다.

유비호가 쓴 가사들은, 말하자면 그가 누군가를 통해 내뱉게 만드는 말들에는 늘 빛이라는 가장 추상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단어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그려내는 빛은 공기 중에 퍼져 있는, 한낮처럼 온통 밝혀진 그런 빛이 아니라 “하나, 둘, 넷, 일곱, 아홉, 열, 열열백백, 백백천천, 억억억억 그리고 무수한”, 그렇게 아주 작은 하나의 단위로서 모이고 함께하고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개별성이다. 말하자면, 그 빛은 일종의 몸짓으로서 혹은 몸짓과 함께 등장한다. 분절된 빛을 따라(2014), 상호 침투: 접힌 공간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구성하는 세 작품 중 하나인 (2016), 꽹그랑꽹꽹깽(2018)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손에 쥔 거울로 빛을 반사하여 영상을 촬영 중인 카메라에게로 되돌린다. 빛은 그 거울을 든 사람의 손짓과 그들이 취하는 동작에 따라 번쩍거리고, 바로 그 뒤로 그들의 구체적인 몸과 표정이 드러난다. 유비호가 요청하는 빛은 바로 아주 구체적인 몸의 고유한 몸짓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스르-륵 총총총(2018)이 보여주는 반딧불 같은 빛들의 모임, 그 군집이 알려주는 것은 장노출로 촬영해 움직임의 궤적만 남고 형체는 사라진 바로 그 몸의 범위이다. 어떤 몸이 가질 수 있는 범위, 어떤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크기는 카메라라고 하는 광학적 기계를 거쳐 하나의 범위 안으로 수렴된다. 희미하고 희뿌옇게 남겨진 몸의 궤적은 바로 눈에 보이는 빛들을 가시적일 수 있게 만드는 전제인 것이다. 따라서, 유비호에게 있어서 빛이란 전능하게 어딘가에서 내려 쬐어 우리를 구원할 그런 신앙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체의 몸짓이 생산해내는 박제된 시간이자 가능의 순간이다. 우리는 그러한 몸짓의 빛이 놓여있는 장소에 대해서도 주목해볼 수 있다. 유비호가 2011년 제작한 조각난 빛이 설치되어 있는 곳은 아주 좁은 감옥과 같은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어떠한 몸도 몸짓도 없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빛의 조각만이 갇혀 있었다. 그에게 빛은 오직 몸짓을 통해서만 드러날 때 열린 장소에서 다른 빛들과 관계 맺고 집합적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낱낱의 말들과 노래를 통해 드러나는 빛들, 그리고 그 빛을 가능하게 하는 몸과 몸짓들, 이제 그것들은 어디를 향해 어떤 속도로 흘러가야 하는가? 그 빛들이 흘러 도달해야 할 지상 세계의 입구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유비호의 작업 전체가 바로 그 틈사이를 찾아 내고 그 사물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문학적인 것이 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은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뒷모습이다. 유비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우리가 그 앞모습을 바라보는 금기시되는 양 엄격하고 단호하게 돌아서 있다. 그 모습은 강력하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마주친다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존재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도플갱어처럼. 하지만 이 뒷모습의 형상은 우리의 대리물이나 나와 평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우리에게 뒷모습밖에 내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를 대신해 정면을 응시하고 바라보는 사람이다. 화면 밖의 우리는 화면 안의 형상의 크기만큼의 풍경을 보지 못한다. 그 형상이 가린 풍경의 모습은 오직 그 형상만의 몫이다. 응시의 몫을 나눠 가지는 대신, 형상은 하나의 풍경이 되어 우리에게 정동을 불러 일으킨다. 자체로 분위기가 되고 감정이 되어 현존한다. 만약 그가 뒤를 돌아봐 우리를 웅시한다면, 단숨에 그 정동은 해체되고 고양된 감정은 저 멀리 달아날 것이다. 오르페우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것은 몫을 나눠 가진 자처럼 오직 뒷모습만을 내어 준다.


 

the square of INTERPENETRATION(2016)
© Ryu biho www.ryubih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