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파트타임스위트의 작업에 대하여

OKULO 004: 카운터 픽션-내게 (다시) 거짓말을 해봐(2017년 3월 1일 발행)에 수록.

 

마르코가 대답했다. “저 역시 다른 모든 도시들을 추론할 수 있는 도시의 모델을 생각했습니다. 예외와 배제되어야 할 것과 모순, 부조화, 부조리만으로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만약 한 도시가 이와 같이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비정상적인 요소들의 숫자들을 점차 줄여나감으로써 도시가 정말 존재할 가능성을 점점 높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저는 이런 제 작업을 어떤 경계 이상으로는 밀고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진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나 진짜 같은 도시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때까지만 그것은 가능할 겁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에서

 

지난해 7월 열렸던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에는 공동의 좌표: 한국의 예술가 콜렉티브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트타임스위트의 이미연이 기획한 이 프로그램에서는 믹스라이스, 리슨투더시티, 옥인콜렉티브, 파트타임스위트, 미켈란젤로 피스똘레또 밴드의 영상 작업 한 편씩을 연달아 상영했다.1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작업들을 보면서 가장 명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현대적 삶을 이끄는 도시 시스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사회비판적인 목적성을 뚜렷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근대식민과 도시개발시기 강제 이식된 식물을 통해 이주의 문제를 다루거나(믹스라이스), 도시개발의 폭력을 옥바라지골목이라는 구체적 사례로 제시하고(리슨투더시티), 국가가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행태를 비꼬기도 한다(옥인콜렉티브). 이러한 비판적 성향은 강조되든 그렇지 않든 작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읽히는 것이자 콜렉티브로 명명되는 일군의 2010년대 한국 작가들의 외연이 규정되는 간편한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관성보다 내게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여러 영상 작업들이 병치되면서 생겨난 위화감이었다. 그것은 예술적 작업을 이용해 현실에 개입하는 각자의 방식과 태도가 서로 상이하여 하나의 테두리 안에 봉합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모종의 불일치의 감각이었다. 내게는 이 경험이 꽤 의미심장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콜렉티브라는 이름의 집단적 자기조직화는 공통의 미적 실천 전략이 아니며, 따라서 용어 자체를 특정한 정치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함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2 개별 작업이 어떤 층위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해 면밀히 고찰하지 않는다면 예술과 정치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에 균열을 내고 사태를 전복시키는 기능적인 힘은 축소되며, 정치성(혹은 미학)은 말뿐인 선전의 문구가 되어 공회전할 뿐이다. 콜렉티브라는 정체성의 형성은 특정 시공간의 사회적 상황에 의해 요청된 것이겠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작업의 작동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임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비판적 예술의 정치성을 가늠하기 위해 응시해야 할 초점은 과연 하나의 예술적 작업이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고 뒤트느냐이다. 콜렉티브라는 이름이 비판적 예술의 한 모습을 표상한다 했을 때, 그것은 당대에 지속되는 아방가르드의 내러티브를 떠받친다.3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한국의 콜렉티브들을 유형학적으로 가시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개별의 예술적 실천을 경유해 당대의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사례는 파트타임스위트의 작업이다. 지하실을 일시적으로 점거했던 첫 작업 언더인테리어(2009)부터 최근 SeMA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에서 선보인 VR(Virtual Reality)영상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2016)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작업은 끈덕지게 도시공간과 도시 안의 주체에 관심을 가져왔다. 퍼포먼스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부터 설치, 출판, 사운드, 영상, 전시를 망라하는 작업의 형식은 일견 특정한 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좀 더 깊은 층위에서 작업들은 일관되게 하나의 매체를 변주한다. 그 매체란 바로 픽션이다.

픽션으로의 전환

매체로서의 픽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 용어에 관한 개념의 위상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모방과 재현의 시간 속에서 역사의 대상이 되어 온 예술(작품)이 언제나 일종의 픽션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미니멀리즘이 열어젖힌 현상학적 체험의 미학은 (애초의 급진성과는 무관하게) 거의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픽션의 경험, 혹은 픽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픽션으로 비평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킨다. 그로써 픽션은 산출된 대상으로서의 결과물을 넘어서는 관계적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픽션으로의 ‘전환’은 단순히 예술사의 변증법적 전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세계를 유지시키고 당대의 세계가 요구하는 사고/행동 방식에 맞닿아있다. “스펙터클은 일련의 이미지들이 아니라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기 드보르의 말에서, 이미지를 픽션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리라(포켓몬고가 이것의 정확한 예시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픽션은 극명히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입장들 사이에서 폭넓게 그리고 유연하게 운신한다는 것이다. 시각문화의 헤게모니는 강렬한 감각만을 위한 멸균실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픽션은 이를 마주하고 비틀어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요청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매체로서의 픽션이 지니는 위상은 매우 양가적인데, 조잡한 가상의 무한한 증식을 방기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예리함이 명맥을 유지하는 비정형의 장소인 것이다. 이제 여기서 픽션이란 것이 비판의 형식으로서 과연 어떤 유효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픽션이 매체로 기능할 때 급진적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포스트-매체의 조건이 겨냥하는 바는 픽션을 만드는 매체의 기능적인 조건을 드러내는 것, 즉 픽션 자체가 아니라 픽션이 만들어지는 필연성이었다. 픽션을 향한 매체의 필연성은 과연 어떤 차원에서 제 모습을 정확하게 드러낼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이끌고 나오거나, 우회하거나, 은연중에 반사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비틀린 공간

2009년 결성된 파트타임스위트(이미연, 박재영, 이병재)가 보여준 초창기의 활동은 주로 도시 안의 특정한 공간에 사소한 방식으로 개입하는것이었다. 첫 작업 언더인테리어에서 그들은 서대문구 충정로3가 30-10번지의 지하를 단기간 임대하여 일시적으로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이 공간은 두 개의 인위적인 상태가 혼재하게 되었다. 임대하기 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여러 사물들, 이를테면 낡아빠진 의자, 연이어 붙어있는 환풍기, 벽에 걸린 시계, 거울 등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거기에 파트타임스위트가 만들어낸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환경이 덧대어졌다. 그들은 바닥에 검은 방수천을 깔고 원래의 공간이 상하지 않도록 테이프로 고정시킨 후, 발목이 잠길 정도의 높이로 물을 채워 넣었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장화를 신고 여기저기를 거닐 수 있었다. 지하 공간 안에는 몇몇의 일시적인 조형물들 또한 설치되어 있었다. 지하저널은 면천 위에 수성 사인펜으로 문장을 쓰고 나무 지지대를 이용해 허공에 고정시켜둔 작업이었는데, 천의 끝이 바닥에 깔린 물에 살짝 잠기게 늘어뜨려 놓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글자는 해독할 수 없을 만큼 서서히 번져나갔다. 여러 요소들 중에서도 이 공간이 어떤 성격으로 존재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주는 것은 천장 일부에 핀 곰팡이 주위를 나무 각목으로 프레이밍하고 프레임 사방에 형광등을 설치하여 하이라이트를 준 젖은 기록이다. 1층 식당의 주방으로부터 바닥을 뚫고 내려온 축축함이 키운 곰팡이는 파트타임스위트가 만든 프레임에 의해 마치 캔버스에 그려 놓은 하나의 추상화처럼 보이게 되었다. 특정한 물리적 현실을 언제든 떼어낼 수 있는 조야한 방식으로 프레이밍함으로써 그 현실이 일시적으로 다른 위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이는 세계 자체의 다중적 공존상태를 위한 전략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임대 계약의 조건(공간훼손 금지, 임대만료 이후 원상복귀)이야말로 언더인테리어의 물리적 구현에 필연적인 제약이었지만, 이 공간은 단지 그러한 억압적 상태, 사회의 부조리를 표상하는 것만은 아니다. 파트타임스위트는 현실 그 자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몇몇의 (스스로 완결되기보다는 실제의 환경과 엮이는)부가적인 장치를 중첩시킴으로써 그 현실이 완전히 다르게 작동하도록 공간 자체를 비튼다. 때문에 그곳은 조형적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일시적으로 (가능한)새로운 상황이 중첩되어버리는 기이한 전술적 공간이 된다.

몇 달 후 연이어진 오프-오프-스테이지는 종로구 신문로 160-1번지, 즉 광화문역 바로 앞 빌딩 숲 사이의 공터에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지역 중 하나인 휘황한 도심 한복판에 어색하게 자리 잡은 이 무용한 장소는 파트타임스위트에 의해 일종의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히 무언가로 그곳을 꾸미지 않았다. 다만 공터에 들어서는 입구에 각목으로 어설픈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낮에는 앙상한 골조만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지만 해가 지고 나면 흰색 천이 덧씌워져 일종의 장막 역할을 했다. 공터를 찾은 관객은 귀마개와 손전등을 제공받았고 녹슨 컨테이너와 우거진 수풀이 자리한 공간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리 크지 않은 부지임에도 이 땅은 종로구청과 같은 관공서, 공사 도중 부도가 난 고급 오피스텔 등 서로 다른 주체가 소유주로 혼재해 있었고,4 공터를 가로질러 허공에 매어진 방울달린 고무줄은 바로 그러한 기이하고 추상적인 도시 공간의 소유권을 가시화시킨 설치물이었다. 이러한 설치물이 특정한 사회적 질서를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을 어떻게 임시적인 경계로 구획하는지, 즉 공간 자체를 재형성하기 위한 상상의 방식이었다. 파트타임스위트는 연극의 몇몇 요소를 차용해 공터를 일시적인 공간으로 작동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이 작업에 연동되는 짧은 희곡을 썼고 이를 통해서 도시 전체를 일종의 연극 무대로 삼았음을 드러낸다. 이야기에는 총 세 개의 세트가 있으며5 주인공 A와 B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특정한 캐릭터라기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임을 알 수 있다. 관람객들은 임의적으로 A 또는 B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파트타임스위트가 무대화한 공간은 매우 임의적인 움직임이 생성되는 곳으로 변모한다. 빛으로 가득 찬 메트로폴리스 세트1과 다다를 수 없는 완전한 어둠의 세트3 사이에 낀 세트2는 정의내리기 힘든 회색지대다. 이곳은 관객에게 어떠한 정체성이나 움직임의 방식도 부여하지 않기에 완전히 자기발생적인 행위들로 점철될 뿐이다. 희곡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A: “안녕하신가.”
(그(녀)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A: “당신은 매번 달라 보이는군.”
B: (침묵)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그것이 무대를 비춘다. 이 때 빛은 배우들의 눈과 연결되어 있다. 이 곳, 저 곳을 처음 보는 것처럼 쳐다본다.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린다. 동선은 짜여있지 않다)

A가 “당신은 매번 달라 보이는군.”이라고 말할 때, 그 공간은 일종의 픽션으로 나아갈 상태에 놓여있음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나 어떤 픽션이 발생할 것인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함께 시공간을 점유했던 관람객들이 일시적 공동체로 결속되는 감각이 부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로 환원되기 힘들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파트타임스위트가 회색지대로 만든 임시적 공간은 무언가를 재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도시라는 거대한 통합체와 화해불가능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왜 그것을 지시하고 드러내기 위해 그것이 아닌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가?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태를 응시하기 위해 왜 여분의 상태를 만들 수밖에 없는지, 우회의 필연성이 요청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해 말 두산갤러리의 시선의 반격전에 참여한 파트타임스위트는 루프 더 루프라는 작업을 통해 다시 한 번 또 다른 임시적 공간을 상상한다. 지하와 공터를 거쳐 선택된 곳은 옥상이었다. 이들은 두산갤러리 근처의 건물 옥상(종로구 연지동 246번지)에서 한명씩 번갈아가며 난간을 걸었고(나머지 두 명은 난간을 걷는 동료의 안전을 위해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비디오로 기록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전시장에서 작업을 볼 수 없었는데, 대신 약도가 그려진 인쇄물이 비치되어 퍼포먼스가 이루어졌던 옥상으로 안내받았다. 옥상의 작은 방에서는 퍼포먼스가 기록된 영상을 상영했고, 밖으로 나가면 다양한 모양의 깃발과 바람개비가 설치된 주변 건물의 옥상이 보였다. 공중제비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업에 사용된 깃발과 바람개비는 선언이나 선전이 될 만큼 크기가 크거나 색이 유별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형태가 특이하거나 과도하게 수가 많지도 않기에 유심히 살펴야 인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그저 아주 단순한 형태로 미약하게, 그리하여 풍경에 어색하지 않도록 서있을 뿐이다. 관객은 그것에 대해 형용할 수 있지만 예술 작품으로서 무엇을 표상하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단지 그것이 있었고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이 실재적이었다는 감각뿐일 것이다.

파트타임스위트는 앞선 세 작업을 진행하고 한 해의 활동을 정리하는 책자 파트타임스위트 프로젝트 리포트 2009를 출판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시와 소설, 에세이와 철학서, 심지어 록밴드의 노래 가사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발췌되어 있다. 말 그대로 ‘허구’인 텍스트들이 연관 없이 나열된 사이사이, 멤버들이 서로 주고받은 서신의 일부가 틈입해있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들이 작업을 진행했던 지하실, 공터, 옥상을 다시 찾아가 찍은 사진들이 수록되었는데 그들이 설치했던 인공적인 부가물들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인쇄물이라는 매체에 의해 실제라고 믿게 되는 도시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노스탤지어가 되고, 그 힘의 작용과 동일한 힘으로 작가가 개입했던 시공간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상상적 상태로 남게 되었다.

결성 초기의 파트타임스위트는 예술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생산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상황을 조성하고 그 상황 자체가 스스로 작동하도록 사소한 조건을 부여해놨을 뿐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특정한 공간에 개입하여 그 공간이 기존의 이해나 사용법을 따르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도록 비틀어놓는다. 그 비틂의 방식이란 새로운 행동모델이나 대안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장소성을 해석한 뒤 다른 의미를 부여하거나 기념물을 위치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주 미약하고 단순한 부가물을 현실에 덧대어 실재하는 현실을 다층적으로 분열시키고 유동적인 상태로 만든다. 때문에 그들이 상정한 시간동안 임의적인 그 공간은 실재이면서도 실재가 아닌 기이한 상태가 되어버리며 일시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장소가 되는데, 그 감각은 결국 모든 체계가 극단적으로 무효화되는 파괴적 종말론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생성의 메타포를 포함한다. 즉 상상된 유토피아라거나 정상성으로의 복권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작동 그 자체다. 바로 이와 같은 픽션적인 상황을 만드는 것, 그리하여 픽션이 실재하는 세계와 세계의 시민에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매체적 실천이 바로 파트타임스위트가 공간에 개입하는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분할된 화면

이듬해 파트타임스위트는 드롭 바이 덴이라는 이름으로 문산부터 강원도 간성까지 민간인 출입통제선 부근을 따라 이동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구획을 벗어나 보다 더 넓은 공간에 대한 개입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던 10일간의 여행 동안 작가들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드롭 바이 덴은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영상 작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영상은 그물에 낚시용 부표를 붙여 강물에 띄우는 파로호에서의 퍼포먼스 기록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후 40여분 동안 단채널 화면에는 주로 차를 타고 이동하며 찍은 짧은 길이의 바깥 풍경 숏이 이어지는데, 이 장면들은 끊임없이 다양한 방식의 분할화면으로 변주되고 병치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밤과 낮의 풍경이 같은 비율로 나란히 대비되기도 하고 서로 다른 크기의 작은 프레임 8개가 한 화면을 얼기설기 채우기도 한다. 심지어 이 프레임들 중 몇몇은 병치된 와중 다른 숏으로 바뀌면서 크기가 변한다. 수많은 짧은 숏은 세 멤버들 중 누가 촬영을 했는지 출처가 불분명한데, 화면에 기록된 (주로 풍경일 뿐인) 명시되지 않은 공간과 분열증적인 시간 감각으로 인해 그 익명성은 증폭된다. 인간의 신체가 마주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공간은 명백히 한정적이기에 영상이라는 기술적 지지체가 허구적 개입의 도구로 선택되었음을 이해하더라도, 이들이 파편적인 풍경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할화면으로 재구성한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영상의 전체적인 서사는 분명 일종의 여행기이지만 분할화면 위로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풍경의 이동, 그리고 그 분할의 형태조차 계속해서 변하는 화면은 서사를 뒷받침하기보다는 자꾸만 해체하려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버석한 한줌의 모래처럼 쥐어질 수 없는 것으로 서사를 직조한다고 해야 하겠다.6

분할화면은 이후 파트타임스위트의 작업에서 중요한 형식적 기반이 된다. 2011년 아트선재센터의 City Within the City전에 참여했을 당시 사무소 공식 웹사이트(www.samuso.org)에 그들이 전시기간 동안 수행할 사무소 패치프로젝트에 관한 정보를 게시하여 그 공간을 점거하고(사무소 패치: 게시판), 창고 구석에 쌓여있던 케케묵은 미술 도록과 작가 포트폴리오와 같은 자료들을 잘라내어 스캔한 뒤 웹 공간에 재구성할 때에도(사무소 패치: 급속 아카이브) 분할화면의 변주는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2012년 1월 15일 자정부터 22일 자정까지 정확히 일주일동안만 볼 수 있었던 사무소 패치: 급속 아카이브에서 그동안 제대로 연구되거나 다루어지지 않은 작가들에 관한 텍스트와 이미지를 현재의 시점에서 선별하고 편집하여 76개의 팝업창으로 만들었을 때, 이는 명백히 주류 서사에서 제외된 주변적 역사, 당대의 미술계를 구조화하는 서사에 의해 망각된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 의지로 읽힌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다시 기능할 수 있는 방식을 상상한 것으로 보인다.7 그러나 그러한 비판적 입장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웹이라는 공간에 새로운 주소를 확보하여 페이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사이트에 일시적으로 기생했다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명시적인 무언가를 선언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공간을 비틀어 본 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 방식은 앞서 실제 물리적 공간을 픽션적 상태로 만들었던 방식과 공명한다. 분할된 화면이 어떤 서사에 덧대어져 그 서사를 매 순간 갱신되는 자기-발생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때, 그것은 모종의 이상적 사회와 맞닿는 지점이 도저히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자기-발생적인 서사는 무엇도 해결해줄 수 없으며 심지어 구체적인 어떤 것도 지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의 기술과 사회과학 이론의 수사학이 대안을 요청하고 급진적 모델을 제안할 때(동시에 선택의 폭을 제한시키는 와중), 이와 같은 자기-발생적 모델은 헛되어 보일 뿐이다. 이들의 작업은 왜 흩어짐을 자처하는가? 혹은 왜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이끌리는가? 왜 픽션의 완성이 아닌 픽션의 ‘실패’로 뒷걸음질 치는가?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예술적 실천이 도시의 문제를 다루는 근저에는 동시대 자본주의에 대판 비판의식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비판의 역능에 있어 중요한 지점은 여러 힘이 길항하는 추상적 관계망으로 구성된 시스템의 내적 유동성에 어떻게 충격을 가하고 그 결과로 무엇을 상상하는지이다. 분명한 것은 예술적 실천은 자본주의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기능 혹은 현실정치와 실물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보다는 시스템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변형시켜보는 모의실험에 가깝다. 이 일시적인 개입이라는 모의실험 모델은 자본화되고 물신화된 아방가르드 이후 이 시대에 요청되는 논리일지도 모른다. 예술 사회학자인 파스칼 길렌은 동시대의 예술이 도시와 공공의 영역에 개입하여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발명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둔다. 그는 이 역학관계를 거칠게 도식화한다. 정적이고 (건물이나 도로와 같은 물적 상태에 의해) 고정된 ‘장소(place)’와, 일시적이고 변화하는 움직임으로 특징지어지는 ‘공간(space)’은 주로 권력의 도구로 사용되는 장기적 ‘전략(strategy)’ 혹은 그 기획을 변화무쌍하게 사용하는 단발적 ‘전술(tactics)’에 의해 기념비적 도시(monumental city), 상황적 도시(situational city), 창조적 도시(creative city), 공동의 도시(common city) 네 개의 위상으로 나뉜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이 넷은 명확히 구분될 수 없이 혼재되어 있음을 말하면서도, 길렌이 특히 관심을 두는 것은 공동의 도시이다. 왜냐하면 도시에 개입하는 최근의 예술적 실천이 유효성을 획득하는 곳이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유동성과 임의성이 당대의 도시를 성립시키는 주된 원칙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상황주의자들이 도시를 향해 수행했던 전술적 행위들은 기획된 경험이나 위계적 계층구조 등 비판 가능한 가시성들을 확보했었기에 가능했지만, 더욱 정교하게 복잡해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이제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고 있다는 판단에서다.8 따라서 당대의 예술적 실천은 유동성에 대응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술가들은 세계를 작동시키는 유체를 느리게 만들고 일시적으로 정지시킴으로써 일종의 가능세계를 가시화시킨다. 그리고 유동성에 맞서는 가능세계는 또 다른 유동성, 규정되거나 표상될 수 없이 스스로 발생하는 비언어적 상태를 구축한다. 따라서 자본의 작동을 더욱 더 파악하기가 힘들어지는 것과 더불어 최근의 예술적 실천 또한 점점 더 불가해한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첨예하게 예술적 실천의 기능과 그 작동을 파악해야 할 임무가 주어지는 것이다. 예술적 실천이 수행하는 모의실험이 성공할 확률은 아주 낮을 것이고, 제대로 완수된다 하더라도 단지 극미한 틈을 벌려 놓을 뿐이다. 우리는 그곳에 잠깐 동안 모습을 비추었다 사라지는 ‘상상할 수 없는 시공간’이라는 자율성의 발생을 감지하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 즉 이해의 소여로 남은 것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유동성 그 자체다. 이를 충분히 가시화시킬 때 비로소 예술이 가 닿는 정치성의 결들을 톺아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비판적 예술의 질적인 차원은 대상에의 거부라기보다는 가늠할 수 없는 실체를 최대한 더듬어보려 그것에 육박하는 시도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비판적 예술의 한 면모는 아무것도 비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적 실천이 구체적인 대상에 다다르기 위해 가능한 세계를 참조해야 하는 필연성은 여기에 있다.

2016년 초 파트타임스위트는 XXX멀티-스크린 싱크로나이즈드 뮤직 비디오 프로젝트라는 상영행사를 기획한다. 작가가 직접 만든 50여분 길이의 음악, 그리고 도시를 모티프로 하여 참여 작가인 문세린, 이윤호, 임철민, 존 토레스가 각각 제작한 영상을 한 무대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프로그램이었다.9 다섯 개의 작업은 자신만의 독립적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외견상 그간 파트타임스위트가 지속적으로 변주해오던 분할화면의 방식이 다시 한 번 사용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XXX에서는 할당된 분할화면의 이미지 생산주체가 모두 다르고 그것의 결합 혹은 상호간의 개입 또한 단일한 의지에 이루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이전의 작업 맥락에 비추어보았을 때) 더 급진적으로 우연성의 작동을 상상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가장 최근작인 나를 기다려, 추락하는 비행선에서(2016)는 마찬가지로 픽션적인 것으로 도시공간에 개입하고자 하는 맥락의 연장선 위에서 읽히지만,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실험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논점을 이끌어낸다.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의 전시장 1층 한가운데 설치된 HMD(Head Mounted Display)로 감상할 수 있었던 이 VR 작업에 등장하는 주된 공간은 여의도 지하벙커다. 작가는 보급형 360도 카메라로 이 공간의 구석구석을 찍어 보여준다. 그리고 지하 벙커의 풍경과 겹쳐지거나 연이어 드러나는 곳은 도시의 주변부라 할 수 있는 공사장 터, 고시원, 전자기기 폐기장, 역 앞 광장 같은 곳이다. VR은 관람자를 3차원으로 재현된 세계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기에 그 재현을 더 생생한 현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지만, 동시에 이 말은 어떤 갖은 노력을 하더라도 절대 한 번의 힐끗 봄으로 그것이 재현하는 세계를 조망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VR의 세계는 지각적인 차원에서 무엇보다 실제에 가깝지만 필연적으로 허구일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매체인데, 그 역설을 작동시키는 방식이 흥미롭다. VR이 만드는 생생한 가상의 세계에서 절대로 감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나’라는 주체, 그것의 물질성을 담보하는 신체다. ‘나’의 신체를 제외한 물성으로 가득 찬 세계는 어떤 경험을 이끌어내는가? 한편으로는 그것의 스펙터클과 허무함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VR이 제공하는 시각성은 실제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해를 요구한다. 빌렘 플루서는 우리가 인지하는 대상은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그 자체로 픽션이거나 픽션들의 총체라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지각의 주체인 나, 픽션의 생산자는 과연 픽션이 없을 때 무엇이 되는지 다시 묻는다. 그는 객체가 없는 초월론적 주관성이란 기실 아무것도 아니며(nothing) 또 다른 하나의 픽션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진정한 실제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모종의 관계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10 유구한 서양철학의 역사가 인식론과 존재론의 주변을 맴돌며 주체와 객체의 지위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논박의 과정이었다면, VR이 암시하는 것은 주관성의 소멸이다. 객체만이 명징한 세계에서 관계는 발생하는가? 실제는 실재하는가? 그곳에서는 과연 (무엇이 되었든)무언가를 재건할 수 있는가? 아주 잠깐 극단적인 객체들의 세계를 제공했던 헤드 마운트를 벗고 ‘나’의 주관성으로 귀환했을 때, 과연 그 사이의 어마어마한 틈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혹은 일어났는가)? 이전 작업들이 현실을 허구적인 것으로 조건화하면서 그때그때 스스로 발생하는 실제를 상상했다면, 이제 그들은 실제라는 것 자체를 뒤집어 엎으며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가속주의자의 면모를 밀어붙이는 듯 보인다. 비정상성을 교란시키는 것에서 더 밀고 나가 세계 자체를 무효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상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픽션밖에 없음을, 픽션의 작동을 통해 비판의 형식과 논리가 재발명되고 있음을 몇몇의 예술적 작업을 통해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 상영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믹스라이스의 (어떤 식으로든) 진화하는 식물(2013), 리슨투더시티의 옥바라지골목(2016),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까맣고 뜨거운 것을 위하여(2012), 파트타임스위트의 부동산의 발라드 1(2015), 미켈란젤로 피스똘레또 밴드의 임대(2010~2012). 

  2. 이미연은 기획의 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콜렉티브라는 이름을 규명하려고 할 때 늘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하며, 콜렉티브가 무엇인지 질문하기보다는 “콜렉티브라는 예술가의 집합적 활동영역을 소개함으로써 언제 어디서 무엇을 통해서든 예술이 스스로의 운동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이 구절은 곱씹어볼만한데, 현실에 개입하는 비판적 예술이라는 “집합적 활동영역”에 속하지만 한국에서 콜렉티브라는 명명이 일관성 있는 무언가로 환원되기 힘들다는 자각은, 결국 그들 스스로도 서로 결이 다른 “스스로의 운동성”을 추구함을 드러낸다.  

  3. 김장언, 콜렉티브에 대한 기억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현실문화, 2012, 327쪽. 

  4. 팟캐스트 말하는 미술, 8회 파트타임스위트편 

  5. 세트1은 공터를 제외한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이고, 세트2는 흰 천으로 만든 가림막으로 구획되어 밤에만 활성화되는 어두컴컴한 공터다. 세트3은 세트2에 맞붙어 있는 또 다른 공터인데, 이곳은 CCTV로 감시되고 있는 미대사관저 부지이며 높게 솟은 담장과 철망으로 인해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아 눈앞에 명료히 보이지만 다다를 수 없는 장소이다. 파트타임스위트는 들어갈 수 없는 이곳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세트2 안쪽에 담장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붉은 계단을 설치해두었다.  

  6. 이들이 영상에 텍스트를 사용하는 방식은 이처럼 결속되지 못하는 서사의 상태를 강화한다. 세 줄로 분할되어 빠르게 흘러가는 서로 다른 풍경을 병치시킨 부분에서 각 화면 위로는 텍스트 또한 흘러 지나간다. 그 내용은 북한과 인접한 전방 지역의 역사적 기억을 상기시키며 강한 정치적 논점을 호출하지만, 왼쪽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텍스트의 움직임은 문장을 문법적으로 독해하는 것을 방해한다. 언어의 선형적 인식이 중단되면서 텍스트는 내러티브를 전달하지만 동시에 내러티브를 다른 감각으로 분산시킨다. 파트타임스위트는 드롭 바이 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해당 지역 사람들의 말을 녹취하거나 작가의 기억에 의존해 다시 서술한 텍스트로 러캐스트라는 제목의 낭송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7. 이와 같은 맥락은 이후의 몇몇 작업으로 이어진다. 사무소 패치: 급속 아카이브RENDEZ-VOUS 13(Institut d’Art Contemporain, 프랑스 리옹)전에 초대되어 2013년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었다. 2015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 막후극에서는 인사미술공간 아카이브에 축적된 2000년부터 2008년까지의 한국미술에 관한 텍스트와 이미지 자료를 이용해 한 개의 열린 구멍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선보였다.  

  8. Pascal Gielen, “Performing the Common City: On the Crossroads of Art, Politics and Public Life,” Interrupting the City: Artistic Constitutions of the Public Sphere, Sander Bax, Pascal Gielen, Bram Leven (eds.), Amsterdam: Valiz, 2015, pp. 273-297.  

  9. 임철민과 존 토레스는 영화감독이고, 문세린은 미술작가이며 이윤호는 사진작업을 한다. 파트타임스위트는 기획자임과 동시에 그들의 2015년 작업 부동산의 발라드 2(2015)로 다른 작가들과 함께했다.  

  10. Vilém Flusser, “On Fiction’” Design Fiction, Alex Coles(ed.), Berlin: Sternberg Press, 2016, pp.136-138. 

파트타임스위트, 언더인테리어
설치, 811 x 717 cm, 바닥에 검은 방수천 설치 후 물을 채움, 2009.
© 파트타임스위트
파트타임스위트, 언더인테리어
설치, 811 x 717 cm, 바닥에 검은 방수천 설치 후 물을 채움, 2009.
© 파트타임스위트
파트타임스위트, 젖은 기록
설치, 316X283cm, 천장 회칠과 곰팡이, 나무 프레임, 형광등, 고무조각, 2009.
© 파트타임스위트
파트타임스위트, 젖은 기록
설치, 316X283cm, 천장 회칠과 곰팡이, 나무 프레임, 형광등, 고무조각, 2009.
© 파트타임스위트
파트타임스위트, 오프-오프-스테이지 입구, 2009.
파트타임스위트, 오프-오프-스테이지
입구, 2009.
파트타임스위트, 오프-오프-스테이지
입구, 2009.
파트타임스위트, 공중제비
다양한 종류의 깃발과 바람개비 설치, 2009.
파트타임스위트, 공중제비
다양한 종류의 깃발과 바람개비 설치, 2009.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드롭 바이 덴
HD 비디오, 사운드, 41분 15초, 2010.
파트타임스위트, 사무소패치: 게시판
프로젝트 기간동안 사무소 홈페이지(samuso.org)에 기생한 팝업 알림 게시판, 2012.
파트타임스위트, 사무소패치: 게시판
프로젝트 기간동안 사무소 홈페이지(samuso.org)에 기생한 팝업 알림 게시판, 2012.
파트타임스위트, 사무소패치: 급속 아카이브
전시 기간동안 사무소 홈페이지(samuso.org)에 기생한 76개의 팝업창, 2012.
XXX 멀티-스크린 싱크로나이즈드 뮤직 비디오 프로젝트, 5개 스크린, 4.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51분 55초, 2016.
기획: 파트타임스위트, 문래예술공장 상영 장면.
XXX 멀티-스크린 싱크로나이즈드 뮤직 비디오 프로젝트, 5개 스크린, 4.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51분 55초, 2016.
기획: 파트타임스위트, 문래예술공장 상영 장면.
XXX 멀티-스크린 싱크로나이즈드 뮤직 비디오 프로젝트, 5개 스크린, 4.1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 51분 55초, 2016.
기획: 파트타임스위트, 문래예술공장 상영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