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픽션의 한계: 류한길x이한범

OKULO 004: 카운터 픽션-내게 (다시) 거짓말을 해봐(2017년 3월 1일 발행)에 수록.

 

류한길 화창한 날씨에 우산 없이 나갔다가 갑자기 우박이 쏟아지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인간의 시간 내부의 우연과 우발성을 다루는 평균적인 허구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허구 그 자체는 화창한 날씨에 우산 없이 나갔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빌딩만 한 닥스훈트를 보게 되는 경우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생각할 수 있음’이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우연히 교통사고를 매우 자주, 반복적으로 겪으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사람의 트라우마가 하나의 저주처럼 그의 자손에게까지 이어지고 결국 그의 가계에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의 진화 또는 퇴행을 촉진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조차도 최신의 과학이 추론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는 하나의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전자의 허구는 평균적 이해를 통해 평균적 서사를 만들어 버립니다. 후자의 허구는 비평균적 이해를 발생시키고 이를 통해 우리의 평균적 세계 인식 자체에 압박을 가합니다. 이처럼 지시될 수 없는 어떤 것의 존재성을 사유하는 것은 철학이나 예술에서 시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리의 경우만 해도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이라고 지시할 수는 없지만 직감이 되는 실재가 현현하는 순간을 저는 종종 경험합니다. 허구는 생각할 수 없는 경우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촉진 장치이고, 그 허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났을 때 우리의 인식과 믿음을 압박한다는 측면에서 실재적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진실로 말이 안 되는 내용,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내용을 발명하고 그것을 평균적 세계 인식에 압박을 가하는 형식틀로 작동시켜 모의실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SF소설이 생각할 수 없었던 여러 허구를 만들어내었고, 시간차는 있지만 그것이 기술 사회의 증식과 인간 사회의 정치적 변화를 통해 사실로 또는 사실과 유사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이미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히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저는 도래한 적도 없고 도래할 수도 없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문제는 끊임없이 즉흥적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서술과 재현 자체가 불가능한) 허구를 우연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은 여러 인간적 제약 안에서는 구현되기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우연적인 허구, 스스로의 존재를 즉흥적으로 뒤바꾸고 비틀고 증식할 수 있는 허구가 사실로서 또는 예측 가능한 것으로서 변환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우리는 많이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그나마 사용 가능한 것은 사변과 추상, 그리고 그로 인한 허무하고 비관적인 시선 밖에 없지 않은가 싶습니다. 기존의 통념이 이러한 입장에 대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 정도로 파악하는 것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직면한 전방위적 생존의 문제가 위급한 상황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문제와 왜 직면하게 된 겁니까?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라면 미래에 대한 예측은 좀 더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인간의 기술은 이토록 발달하고 있는데 왜 항상 예측은 빗나갑니까? SF의 허구 서사가 미래 예측으로 드러나기 전에 인간은 왜 꼭 현실의 파국을 겪고 나서야 무언가를 막연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의 문제를 깊이 고찰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 상황의 상당수는 항시 인간 외부의 조건들 속에서 발생하고 인간은 거기에서 떨어져 나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인간 내부의 문제, 인간과의 연결성이 직접적으로 증명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곤 합니다. 우리가 진정 위기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조건들의 외부에서 외부적 존재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그 외부를 정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허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당연히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무수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정치 사회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예술 작품 또는 인간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는 그런 작품에 거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예술은 그 자체의 정치성마저도 자본화하는 장치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자유주의 예술가들이 정치적 올바름 코스프레를 통해 자기를 자본화하는 모습을 봅니다. 인간적인 문제를 오로지 인간적인 시선으로만 다루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를 오염시켰고 그것의 생명력을 극한까지 빨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어린이들이 가득한 배가 침몰했고 약에 찌든 국가 지도자가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생명력의 극한까지 빨아 먹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요? 그냥 텅 빈, 생명력이 없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인간 존재가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껏 외부의 것으로만 생각했던 무엇이 지구의 내부로부터 튀어나오게 될까요? 인간은 생명의 개념도 오로지 인간의 기준 안에서만 생각하며 인간 없는 생명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아닌 것의 존재와 생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계속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장르적 허구 서사들이 보여준 생각할 수 없는 것의 발명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제한적인 기술과 언어의 방식으로 모의실험을 해낸 형식들에 깊이 매료됩니다. 저는 음악을 합니다. 인간이 음악을 발명하고 고착화 시킨 지점에서, 어떻게 허구의 음악을 생각할 수 있을까를 고려해보면 그것은 꼭 음악으로 드러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글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행동이 될 수도 있으며 실험 과학이 될 수도 있고 아침 식사 또는 조금 있다 저에게 닥칠 매우 재수 없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여전히 음악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그것들이 음악일 수 있도록 설명하는 장치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러한 생각들은 지금 저를 통해 발명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것들조차도 이미 사실인데 제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한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되었든 떠오른다는 점에서, 무한 불가능 확률추진(infinite improbability drive)을 작동 시키는 한 요소는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한범 제게 픽션이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그때그때 발생하는 개별적인 가능의 상태’라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서사(narrative)가 픽션을 만드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픽션은 서사보다는 허구로 번역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허구란 용어도 이상한데요, 명사가 되면 ‘가상’ 혹은 ‘가짜’와 변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현의 굴레에 빠져버리죠. 픽션이라는 말 자체는 명사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적인’, ‘~이 되는’ 정도로 형용사나 동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명사로의 픽션은 엄밀히 따지면 픽션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명사가 되는 순간 어떤 고정된 실재성을 확보하게 되지 않나요? 비가시적일 뿐이지 허구의 위상은 허구적이지 않은 것의 위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 때문에 하나의 예술적 작업에 접근한다 했을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픽션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픽션인지, 혹은 ‘어떻게’ 작동하는 픽션인지를 생각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한’ 픽션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이 포함된 다른 지평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술은 기능적인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류한길 지난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연과 사운드 공연을 포함한 연속 동사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이 제목은 ‘소리’라는 것을 지시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 끝에 지어낸 용어에요. 소리는 연속체입니다. 연속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소리라고 지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내가 어느 특정한 순간의 청각적 경험을 지시하는 순간 그 청각적 경험은 없어져 버리고 다른 순간의 다른 청각적 경험으로 넘어갑니다. 때문에 ‘소리’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건 저의 청각적 경험에 대한 정확한 지시가 아니게 됩니다. 명사 ‘소리’가 이토록 제한적이라면 다른 이름, 다른 언어를 제안해보면 어떨까 하다가 ‘연속 동사’라는 용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리가 동사적 성격이 있다고 본 것이죠. 이런 생각을 하다가 흥미로운 허구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는데, 바로 엑소시즘이에요. 엑소시즘을 할 때 가장 먼저 악마의 이름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걸 모르면 빙의된 몸에서 악마를 빼낼 수 없기 때문이죠. 즉 목적하는 대상의 이름을 정확하게 호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빙의된 몸을 지칠 대로 지치게 만들죠. 왜냐하면 악마는 빙의된 몸을 자신의 주소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소를 알고 있고 이름까지 알아내게 되면 더 정확하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악마를 빙의된 몸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언어로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놓인 위치, 장소를 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이름과 주소로 지시할 수 없는 것들이 사실은 너무나도 많다는 거죠. 저는 그런 것이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조형적일 수도, 음향적일 수도 있겠죠. 퀭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가 그의 저서인 유한성 이후(After Finitude)에서 언급한 촛불 이야기가 있어요. 촛불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촛불에 손을 대면 나는 뜨겁다고 느끼지만 촛불 자체는 스스로가 뜨거운지 안 뜨거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촛불 자체에는 뜨겁다 안 뜨겁다라는 게 없는 거죠. 촛불에서 손을 멀리하면 뜨거움이란 것은 나의 것도 아니게 되고 촛불의 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뜨거움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수학적으로 이것을 공식화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런데 현대과학과 관련하여 철학에서는 우리가 수학 공식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무엇인지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왜 작동하는지는 알 수 없는 거죠. 그 수학 공식도 결국은 뜨거움처럼 독립적인 다른 객체로 존재하는 겁니다. 소리도 공식화 시키면 ‘소리’라는 명사가 지시하지 못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공식이 소리의 존재 자체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인파가 있다고 합시다. 이 사인파의 주파수가 커지면 ‘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동일한 주파수의 위상이 다른 사인파 또한 똑같은 ‘삐~’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합성하면, 즉 두 개의 다른 위상이 만나면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침묵의 상태가 됩니다. 분명히 두 개의 에너지가 작동을 하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는 거에요. 음향적으로 침묵이라 했을 때에도 물리적으로는 최소 두 개 이상의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는 상태로 보면 됩니다. 인간이 침묵을 얘기할 때 지시하는 범주는 매우 협소하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과연 이때 소리 혹은 소리의 에너지는 실재일까요, 허구일까요? 모호합니다. 우리가 지각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한범 작년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렸던 전시 무빙/이미지의 한 작품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마농 드 보어(Manon de Boer)의 불협(Dissonant)이라는 영상이었어요. 카메라가 플로어에서 움직이고 있는 한 명의 무용수를 따라가며 찍고 있는데, 필름을 갈아 끼우는 순간에 화면이 완전히 까맣게 되면서 아무것도 안 나오는 순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여분의 시간 동안 현장의 소리는 계속 녹음돼요. 시각적으로는 몸을 인지할 수 없지만 소리라고 하는 다른 감각의 차원에서는 너무도 명백히 그 몸이 실재하는 것이죠. 저는 이 짧은 영상이 카메라와 필름이라는 기술적 도구를 통해 픽션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혹은 어떻게 드러나고 작동하는지 탁월하게 은유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류한길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없음(nothing)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다고 인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동일한 에너지가 서로 반대되는 위상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죠. 이 사실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의 힘의 작용으로 생각하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길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순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데 두 개의 명제를 아까 이야기한 사인파의 문제로 생각해 보면 불일치 또한 특정한 파형을 창출하게 됩니다. 모순을 일으키는 명제 자체가 무엇인지, 그 명제가 촛불과 나 사이의 뜨거움 같은 것이라면 그 명제 자체의 이름과 주소는 어떻게 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험하는 장치로서의 픽션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이한범 픽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지점이 거기에 있는 듯 합니다. 픽션이 유의미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사물과 사물의 위치에 대한 통상적 이해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사물이 어떻게 꺼슬꺼슬한 세계의 잔여로 남는지, 그것이 어떻게 모종의 작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불현듯 환기시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술작품의 경우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적인 측면은 모든 작품 자체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픽션으로 드러나게 되는 실제적인 조건은 분명히 있다고 보는데, 결국은 그 조건에 대한 이해는 매체와 매체의 형식에 관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저는 예전부터 ‘비언어적’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단지 언어적인 것과 변별되는 장르적인 의미의 비언어적 예술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상태일 수 밖에 없는 당위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예술계’라는 것이 언어적인 것으로 순환하고 있는 움직임 안에서도, 가끔 굉장히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작업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전달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은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고요. 그런 감각을 좀 더 폭넓고 정교하게 다루는 방법론으로 비언어적이라는 표현보다는 픽션을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비언어적이라고 했을 때 다소 오해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면, 예술 작품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정말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비언어적인 것, 그리고 픽션을 상상한다 했을 때, 글을 쓰려고 하는 의지 자체가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거죠. 그 상황에서 결국 언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매우 협소한 듯 합니다. 만약 유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서, 그 주변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최선이 아닌가 생각하는 중입니다. 정확하게 지시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드러냄의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저의 궁극적인 고민인 것 같습니다.

류한길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라는 철학자가 실재하지도 않았던 전시에 관한 리뷰를 가장해 교수대-말(The Gallows-Horse)이라는 짧은 소설을 썼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지각으로 접근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는) 사물들의 자기-즉흥 현실(self-improvising reality of objects)”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계속 무한하게 변하는데 한번도 동일한 것이 아닌 것, 한 번 보고 다시 뒤돌아 봤을 때의 상태가 완벽하게 다른 무언가라는 것이죠.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사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어요. 분명히 실재하고 지각할 수 있지만 계속 바뀌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지시할 수 없는 것, 이제 이런 것을 드러내고 그 가능성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픽션 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최근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의 부름에 등장하는 크툴루(Cthulhu)가 경제, 정치, 사회적 연구에서 ‘서술할 수 없는 무엇’의 새로운 절대적 메타포로 등극했어요. 크툴루는 너무나 절대적인 공포입니다. 공포의 이유는 크툴루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 크툴루라는 것은 분명 맞닥뜨릴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무엇이다라고 어떻게 말할 길이 없는 겁니다. 언어 체계든 뭐든 인간의 그 무엇으로도 말할 수 없어 십중팔구는 미쳐버리죠. 가끔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후대에 경고하기 위해 서술을 하려고 하는데 안 써지죠. 그러다 보니 유일한 방법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을 기록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좀 전에 말씀하신 글쓰기에 대한 얘기와 비슷하겠군요. 사변적 실재론에서도 크툴루 얘기가 계속 등장하고, 심지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거론되는 흡혈귀 얘기를 이제 크툴루로 대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절대적인 기준점을 신으로 생각해왔다면, 이제는 그 기준점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에 픽션 이외에는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한범 저는 사실 처음에 픽션을 생각하면서, 서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서사가 픽션과 대척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해주신 서사적 픽션에 관한 얘기를 들으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좀 더 복잡하다고 느껴집니다.

류한길 러브크래프트가 크툴루를 얘기하면서 언어적 사건으로 서술했죠. 서사를 쓰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한범 최근 길베르토 페레즈라는 영화비평가의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장 르누아르의 영화 시골에서의 하루에 대해서 쓴 글 중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페레즈는 통상의 견해와 달리 이 40여분의 짧은 영화에서 서사적 픽션이 아닌 카메라가 찍은 풍경이 중요한 픽션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의 중후반쯤 주인공들이 배를 같이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카메라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배가 나아가는 방향으로 풍경을 담아야 하는데, 여기서 카메라는 배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풍경을 찍습니다. 무심히 보고 있으면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데, 그걸 인지하는 순간 무척 이상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한 작업 안에서 여러 가지 차원의 픽션이 작동한다는 생각이 무척 흥미로웠죠. 페레즈의 이 섬세한 관찰을 엿보고 나니, 좀 더 확장된 영역에서 픽션의 기능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북해에서의 여행(A Voyage on the North Sea)을 보면, 소설이 역사적인 어느 순간 픽션을 만드는 관습적인 기술적 지지체가 되었고 마르셀 브로타스는 그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이 지점에서 브로타스는 서사보다는 서사적 경험의 재구조화라는 길을 선택한 듯 보이고요. 여기서 책이라는 물성은 무척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류한길 언어화된 것은 프린트되고 제본되는 방식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출판 시장에서 나오는 책의 형태라는 것이 또 다른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배급되는 상태가 있을 거고, 자주 출판의 영역처럼 배급이 잘 안 되는 영역이 또 있을 거고, 배급이 안되게끔 하는 작업도 있을 수 있고요. 상황주의자들의 예를 들어보자면, 책 표지를 거친 샌드페이퍼로 만들어서 도서관에 들어가게 되면 함께 꽂힌 다른 책을 갈아버리는 그런 방식도 있는 거죠. 이건 단순히 서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가 제작되어 물질화 되고 상품이 되었을 때 파생되는 다른 픽션의 가치들이 있다는 겁니다.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서술하는 내러티브와, 언어화되어서 제품이 되고 소비되는 단계를 무화시키는 방식, 어떻게 제본을 하고 어떻게 유통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 고민을 해야 하는 거죠. 제가 오래 전 자주 출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남들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 내러티브, 패턴과는 다른 내용과 형식을 통해 무언가를 하려 할 때, 현실적으로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해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프린트하고 자르고 제본하고, 그렇게 소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실은 자본주의 시스템부터 출판계의 권위주의나 제품에 대한 미신,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작동할 수 있는 길이라고 봤던 것이죠. 지금의 자주 출판은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고요. 잘 정리되고 깔끔하게 마감된 것이 시장 안에서 구체적으로 향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그 물성 자체가 욕망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재의 자주 출판에 대해서 저는 어떤 비관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한범 예술이든 아니든, 모든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급진적이냐 하는 생각을 전제를 한다면, 그 고민을 수행하는 것에는 형식이나 매체가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텍스트가 매우 추상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활자가 아니라 텍스트라는 이름이 가진 굉장히 미묘한 의미의 층위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어떻게 물질화하고 어떻게 유통할 것인가가 급진적인 하나의 방식일 텐데, 사실은 지금은 그런 것까지 상상하는 입체적인 에너지를 찾기가 어려워요. 이건 물론 텍스트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이 유통되는 전시라는 방식, 영화가 유통되는 상영이라는 방식, 사실 이것들은 관습적일 뿐 매우 협소한 예술적 결과물의 장소이자 분배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여타의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또한 매우 어려운 일이죠. 다른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발명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끈덕지게 픽션을 끌어들여야 하는 것 같습니다.

류한길 전시할 수 없는 작품을 구상한다면, 그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방식은 따로 있을 겁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재미있어요. 그 방식이 유효하면 할수록 정말 이상하고 덧없어 보일 겁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죠. 여기서 미친 사람의 이미지를 얘기할 때 조심해야겠는데요, 미친 사람을 ‘연기하는 것’과 구분해야 합니다. 영화 속의 사이코패스는 연기가 가능합니다. 그만큼 그런 이상함은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습니다. 예측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비틀기가 더 시도되어야 할 테고요. 사실 정말로 미친 사람은 사회적 질서 안에서는 아주 멀쩡하고 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람이 만들어낸 생산물이 너무나도 이상할 뿐이죠.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자식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데요. 자기 자식으로 말하는 그 상투성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 때문입니다. 픽션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뜨거움의 감각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촛불에 손을 가져가 뜨거움을 느낀 것을 말하고 손을 멀리 했을 때, 나에게 뜨거움은 사라지는 것처럼요. 그게 자기 자식일 리가 없잖아요?

이한범 각자의 픽션이 겨루는 상태가 보고 싶습니다. 픽션과 픽션의 간섭.

류한길 닉 랜드(Nick Land)가 예전에 쓴 글을 봤습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새로운 것’에 대해 회의하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상상력보다 더 빨리 앞질러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제공해주는 서비스라는 겁니다. 사변이나 추상이라는 기제를 통해 내놓는 결과는 이미 자본주의가 다 예측하고 있고, 새로움이라는 주장은 다 미신이라는 거죠.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스템이 예측하지 못하는 것,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비자본적인 제작 방식을 통한 생산입니다. 생산을 안 할 수는 없죠. 결국 자본의 문제는 제작 단가가 올라가면 그만큼 리스크도 커진다는 것인데, 그 리스크의 굴레에 빠지면 반자본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리스크에 대한 부담을 적게 가져가면서 내 할 말하고 내 생존을 도모하는 시스템이 개별적으로 다 존재해야 하는데, 지금의 현실은 그게 다 죽어버린 겁니다. 이건 단지 외부적 상황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을 때,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나의 픽션이 있어야 합니다. 내 픽션에 맞춰 생산 방식을 발명할 때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가 생각지도 못한 괴물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 자신이 크툴루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떤 시스템에 종속되어 맞물려가기 위한 변형이 아니라, 스스로 픽션을 구성할 능력이 절실합니다. 각자의 픽션이 어떻게 알 수 없는 것을 더 효과적이고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모의 실험하는가가 겨루는 포인트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왜 겨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싸움 구경, 불 구경이 재미있기는 한데…

이한범 픽션에 대해 고민할 때 결국은 아방가르드라는 용어가 제게 끈덕지게 달라붙습니다. 요즘 번역 작업을 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자기-조직화된 집단에 관한 얘기에요. 작가라고 이름 붙일 수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예술적 결과물이나 전시를 한 것이 아니고 인쇄물을 만들거나 도서관이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실천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상한 짓이고 별 의미가 없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신의 지난 시간이 아방가르드의 역사라고 지칭하는 거였습니다. 글로벌 미술 사조에 부합하거나 거대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이론, 혹은 연대기적 터닝포인트를 만들어 내는 기술적 모델로서의 어떤 예술이 아니라 그와는 독립적인 정말 사소하고 지엽적인 행위들, 이런 것들을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실천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해서 인상 깊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사회나 현실, 혹은 예술 그 자체와 동떨어져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 각자 나름의 픽션을 상상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움직임을 지속해왔다는 점에서 저는 매우 급진적이고 유효한 실천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지금 더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류한길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보면, 예술가들이 혁명이 시도될 당시에는 최전선에 있었지만 모두 숙청되지 않았습니까. 체제의 전복이 완수되면 인간은 안정을 원합니다. 안정을 원하는 장소에서 아방가르드는 제거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거죠. 브렉시트든 미국 대선이든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상황은 질서를 더 강하게 갈구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여기서 질서와 반질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특정량의 반질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그 양은 상황에 따라서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고, 즉흥적으로 또는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려고 하니 생각할 수 있는 매체는 픽션밖에 없는 것이고요. 음향 합성법을 공부하다 보니까 개념적으로 흥미로운 게 많더라고요. 가장 기본 단위의 진동을 피드백하면 음높이가 올라가고 이를 공식화 시켜서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다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배음(harmonic tone)이 풍성한 음이 됩니다. 특정한 높이의 음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은 배음 중에 가장 높은 주파수이고, 우리 귀는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것을 음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안에 많은 배음이 있죠. 여기에 특정 주파수를 빼느냐, 더하느냐로 다른 밀도를 지닌 소리를 만듭니다. 이 자체가 저는 픽션이라고 봅니다. 컬랩스(Collapse)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출판하는 어바노믹(Urbanomic)의 운영자 로빈 맥케이(Robin Mackay)는 철학자들은 신시사이저(synthesizer)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최근 제 고민은, 그렇다면 픽션을 피드백하는 과정은 무엇이 있을까하는 겁니다. 굉장히 다양한 배음으로 구성되는 맥락이 최소한의 상태로 다시 변화할 수 있을까, 혹은 없을까? 저의 작업에 기반해서 생각하는 것은, 드럼을 치면 나는 ‘쿵!’, ‘딱!’ 하는 그런 최소 단위의 소리를 더 복잡한 것으로 느껴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하는 것입니다. 소리가 가진 물질적 감각을 복잡하게 가져가는 것, 음향적 물성을 보다 선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제가 사운드 작업을 할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단지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픽션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픽션에 픽션을 되먹이면 뭐가 될까요? 그러한 상태의 소리를 만드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이한범 픽션이 픽션을 통해 작동한다?

류한길 이러한 고민은 레자 네가레스타니가 올 오브 트위스트(All of Twist)에서 한 말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네가레스타니는 이 글에서 비틂에 대해 얘기하는데, 비틂을 위해 가장 유용한 도구가 음모 이론이나 탐정 소설과 같은 장르물에서 보여지는 것이에요. 시뮬레이션하고 엔지니어링한다는 표현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 사람이 철학자임에도 서사 구조를 가진 소설을 쓰는 이유는 시뮬레이션하고 엔지니어링하기 위해서인 거죠. 멀쩡한 이야기라도 비틀어버리면 탐정물에서나 나올 법한 괴이한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이걸 물리적으로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예를 들어 평면의 종이를 뒤틀어 봅시다. 그렇게 생긴 공간 안에는 일종의 나선형이 생깁니다. 최초의 TV를 개발한 파울 니브코프(Paul Gottlieb Nipkow)는 니브코프 디스크라는 판을 만드는데, 구멍이 나선형으로 뚫려 있습니다. 피사체에서 나오는 빛이 회전하는 원판의 나선형 구멍에 의해 순차적으로 분해되고 그 빛을 센서가 하나하나 전기 신호로 바꾸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이미지 정보를 아주 먼 거리로 보낼 수 있게 되는 거죠. 여기서 왜 나선형이냐 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네가레스타니가 서사를 비튼다는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해요. 들뢰즈도 모든 종류의 철학은 탐정 소설 같은 거라고 얘기를 하는데, 모종의 연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픽션이 있고, 픽션의 피드백이 작동해야 하고, 픽션의 즉흥이 일어나야 하고, 픽션의 객관성이 발생해야 하고… 이런 픽션의 총체성이 우연(contingency)이 되어야 자본주의라는 기계가 ‘저게 뭐지?’ 할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미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게 맞다고 봅니다. 패턴을 벗어나는 짓을 하는 거죠. 패턴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인간이 인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간에 감각의 정보가 패턴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음향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하나의 파동이 계속 반복 되어야만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연속 운동이 깨지면 무엇을 듣는지 알 수가 없어요. 자본주의 시스템도 패턴 분석을 해서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패턴을 분석한다고 해서 그 다음 패턴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밀릴 수 밖에 없는 이유이고요.

이한범 자크 아탈리가 노이즈에서 시스템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으로서의 노이즈를 얘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작가님이 사운드로 작업해온 지난 시간과 겹쳐 보이기도 하고요.

류한길 그렇습니다. 일반적 감각은 패턴으로 직조되어있는데, 패턴이 아닌 것은 거기에 수용이 안되니까 재미없고 이해 안 되는 무언가가 되어버립니다. 저는 그 패턴이 깨질 수 있는 방식을 계속 상상합니다. 네가레스타니가 전시 리뷰를 가장하면서 쓴 소설이 흥미로운 지점이 거기에 있는 거죠. 누가 작정해서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굉장히 우발적으로 즉흥을 해버린다는 것, 그런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 철학과 예술이 중요할 겁니다. 그나마 그 두 가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픽션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이한범 예술에서 픽션을 말하는 것이 사실은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는 주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션을 다루는 책이 쏟아져 나오고 그 용어의 사용이 상당히 눈에 띈다는 점은 징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유효성을 떠나서, 이는 예술에서 픽션을 좀 더 엄정하고 꼼꼼하게 따져봐야 하는 시기라는 얘기가 아닐까요?

류한길 픽션을 저 나름대로 규정하는 게 무엇이냐면,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생각할 수 있음’에서 더 나아가 아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모순이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한다, 이렇게 되면 작품에 대한 서술은 불가능해집니다. 때문에 내가 생각한 작업과 다른 사람이 작업을 이해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됩니다. 보는 사람마다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이해 방식으로 작동되는 것이죠.

이한범 정서영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사물의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미세하게 조정해나가는 가운데 얻어지는 형이 나의 조각이라고 할 때, 이 조정과 선택의 느린 시간을 지배하는 물음은 ‘그래서 차이를 다 찾았나?’이다.” 모든 가능한 조건들이나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서 상상하고 시험해 보고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나온 것은 과연 어떠한 상태인가? 조형적인 결과물이 나왔을 때, 결국 그것이 차이를 다 못 찾아 냈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실패’이기는 하지만 그 시도들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모의실험의 증명이라는 그런 작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패의 인정이지만 그 실패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여주는 거겠죠.

류한길 인간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를 해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어차피 전반적으로 흘러가는 이해의 궤적이라는 것은 무척 실재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른 궤적을 생각한다는 건 그 이해를 따라가든가 거부하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김태용 소설가의 작업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저는 위어드 픽션(weird fiction)으로 읽었습니다. 기분 나빠할 사람이 너무 많겠습니다만 카프카의 소설 또한 그렇게 읽었고요. 카프카의 소설은 괴기 소설일까요? 아니면 그것을 기어코 괴기 소설로 읽어내는 내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전혀 상관없는 무언가를 놓고 기어코 내 방향으로 읽어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런 세상이 오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추상일수도, 사변일수도, 상상력일수도 있는데, 그 사이에는 분명 픽션이 작동하겠지요.

이한범 작년 한 해 동안 제가 썼던 글을 읽어보면서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계속 분석해봅니다. 그런데 어디서 참조하고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외재성’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더군요. 거칠게 말하자면, 내적으로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 카프카의 소설을 괴기 소설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형식적으로 내재한 실마리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적 작업이 실천해야 할 것은 그 실마리의 올을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것이 현대예술에서의 매체적 지향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것을 뭐라고 지시해야 할지 몰라서 외재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자유롭게 상상하고 반응하고 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 수 있는 잠재적 상태가 있음을 제안해주는, 외재성이 발현될 수 있는 그런 작업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 결국 지금 도달한 것이 픽션이고요. 여기 오기 전에 서점에서 책 정리하다가 우연히 인문예술잡지 F 과월호(11호)를 훑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조효원씨가 번역한 「독일지식인들은 왜 그렇게 나쁜 문체로 글을 쓰는가」라는 발터 벤야민의 짧은 노트가 있었습니다. 벤야민의 말에 따르면, 독일 사상가들이 그렇게 나쁜 문체로 글을 쓰는 것은 인용이 될까 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재미있는 반면 의미심장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의 지식생산체계는 인용과 인용의 인준, 의미의 순환이 가능한 권력으로 작동하는 건데, 예술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에 인용되고 지식에 인용되고 윤리에 인용되고 정치에 인용되고… 인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 혹은 인용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내 것을 지키고 자신만의 철옹성을 쌓는다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인용 불가능을 향한 의지와 외재성의 가치는 일견 대척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쩐지 저는 같은 태도의 다른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텍스트나 조형이 고유한 허구세계와 대응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허구 그 자체로 작동하도록 조건 지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아닐까요.

류한길 어떤 형태의 인용도 허용되지 않는, 즉 인용 자체가 불법인 사회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인용을 하면 극단적으로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에 처해지는 그런 사회 말이죠. 그럼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학자든 비평가든 작가든 어떤 생산적 발언을 하기 위해서 이전의 연구들을 참고해야 하고 자신의 발언을 정리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들을 발명해내야만 할 겁니다. 그렇다면 모두들 정말로 자기 창의력의 극한까지 끌어올려야 할 텐데요. 역설적으로 모두가 창의력의 극한을 추구하게 만드는 사회가 매우 극단적인 통제 사회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죠. 반대로 현재의 모습을 봅시다. 자유가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문화 권력들이 작동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