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강현 감독과의 대화

OKULO 온라인에 게시.

 

이한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진입을 할까, 어떤 입구를 선택해서 열고 들어갈까 고민을 많이 했다. 왜냐하면 첫 질문을 무엇으로 시작하는지에 따라서 이 영화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는 이 영화에는 명확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드라마가 이어지지만, 내게는 인물들의 드라마 이외에도 그들 바깥의 사물의 세계가 훨씬 더 강하게 다가왔다. 인물들에게 영향력을 가지는 사물들, 그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게 느껴졌었고, 사실은 그것을 다루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인물에 대해서 먼저 질문을 해야 할까, 사물에 대해서 질문을 해야 할까, 그것이 내게는 인터뷰 자리에 오기까지 결정하기 힘든 중요한 선택의 문제였다.

이강현 나는 그 두 가지가 관계 맺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먼저, 시스템이라는 것과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이 애초의 비전에서 가장 큰 부분이지 않을까 한다. 이를테면, 어쨌든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기선이라는 존재가 어떤 대상, 타인에 대한 자신의 욕망과 그것이 실패하는 것, 이 또한 나는 시스템과 관계 맺는 방식들 안에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이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이타적인 마음을 품는다는 것, 그런데 왜 기선의 방식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 또한 시스템의 맵 안에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한범 그렇다면 인물들에 작용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강현 몇 마디 말로 잘 이야기할 자신은 없지만, 이런 얘기를 한번 해볼 수 있겠다. 이 영화에는 공간들이 많이 나온다. 공간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곤 했는데, 공간이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한데, 나는 공간을 찍어야겠다거나 다양한 공간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인물, 인간들이 품는 마음과 품은 마음이 행해지는 장소들인데, 예를 들어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했을 때 그 공간의 황량함이나 공간 안에서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모습을 담고 싶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출발은 누군가의 평범한 일기장에 적힐 만한 하루의 기록에서 등장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다. 주말이 되어 나들이를 가고 싶고, 나들이를 가고 싶은 마음에 좋은 장소를 찾고, 그런 마음이 행해지는 장소를 따라 갔던 것이지 특별히 국립중앙박물관이라고 하는 곳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사물도 마찬가지인데, 사물 자체를 골똘히 생각한다기 보다는, 사실은 인간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 같다. 내가 인식하는 방식은 이런 순서인 것 같다.

시스템에 대해 얘길 하자면 다른 캐릭터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면 좋겠다. 혜진같은 경우 삶이 나아졌으면 하는, 더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그런 욕망과 바람이 있지만 사실은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게 바뀔 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줄 만한 무언가는 시스템이 제공해준다. 오히려 의미는 시스템이 던져준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에서는 생존의 문제가 가장 첫번째일 것이고, 더불어 이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질문한다. 그런데 의미에 대한 질문은 답이 안나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시스템은 언제나 적절한 모범 답안을 던져준다. 시스템은 당대의 시간성을 단면으로 잘랐을 때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도, 기술, 문화적인 것들을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미로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은 그 안에 있는, 시스템의 맵이 펼쳐진 풍경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적이라고 하거나 이 모조품의 세계를 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조품의 세계일지언정 그 안에서의 역동, 사람의 감정, 힘, 조금이나마 생기를 찾을 수 있는 삶의 힘같은 것들이 발생하고, 그것이 시스템 안에서 한 점에 불과하더라도 시스템을 오히려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힘들이나 역동이라고 생각한다.

이한범 영화 안에서는 그 시스템이라고 이를 수 있는 구체적인 형상이 바로 삼조정관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전지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CCTV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삼조정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기선의 경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길거리의 CCTV와 마주바라보지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아직 선택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친다. 반면 혜진의 경우 지하철에서 술 취해 누워 있는 여성을 깨우다가 힘에 부치자 CCTV를 향해 도와달라는 듯 적극적으로 큰 몸짓으로 손을 흔든다. 나는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갈등은 결국 삼조정관과 각각의 인물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떻게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삼조정관의 대리인이 기선에게 있어서 매우 사적인 영역이었던 진수를 언급하며 취재해보기를 권했을 때, 이 영화가 얼마나 구체적인 픽션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얼굴 없는, 형상 없는 어떤 힘이 인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삼조정관과 관련하여 각각의 인물에 어떤 갈등을 부여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삼조정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도록 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강현 기본적으로는 말씀하신 내용과 같지만, 내가 구체적으로 갈등을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혜진과 기선이 대응하는 것이 다르다. 혜진은 가장 부박한 것들 사이에 있는 것 같지만, 사람 아닌 다른 존재를 가장 당황스럽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그가 자기 삶에서 버티려고 하는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한범 현수는 거기서 벗어나 있는 사람인가?

이강현 현수는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그들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존재다. 그 역할은, 이를테면 시스템의 톱니바퀴같은 역할이지 않나. 택배기사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상품을 전달하는 사람이고, 그것은 시스템이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에서 상품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인들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은 택배 받는 시간이라는 우스개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택배라는 방식이 전면화된 이후로 택배를 통해 상품을 받는 것은 굉장히 징후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품들로 삶이 이루어진 것이지 않나. 현수는 시스템의 말단에 있는 톱니바퀴와도 같은 존재인데, 그렇지만 그 사람 표정이 좀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인다. 즉 톱니바퀴의 말단이지만 그 시스템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나는 항상 이러한 이중성이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이 부박한 모조품의 세계이지만 그 부박함을 보라고 하고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서의 힘에 관한 것이고 현수는 시스템의 말단의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의미를 배분한다는 것, 그런 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이한범 이 영화를 보면서 양가적이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제목처럼 또 말씀하신 현수의 표정처럼 ‘얼굴들’의 표정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고, 표정에 집중해야 하는 측면이 있는 반면 얼굴이라는 표면의 보여지지 않는 것들 또한 지시하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얼굴의 불가능성이랄까, 얼굴로는 보여지지 못하는 이미지들. 특히 기선은 내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다가왔다. 예를 들어 진수에 대한 기선의 행동이 처음에는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나 배려로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잘 드러내지 않는 기선의 표정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스펙트럼이라고 생각한다.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서의 양가적인 얼굴을 사용하는 것. 영어 제목은 가능한 얼굴들이지 않나. 얼굴에 대한 복잡한 이해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강현 제목이 얼굴들이지만 얼굴이 제대로 나온 장면은 거의 없다.(웃음) 처음에는 정말로 다양한 얼굴을 직접적으로 찍어볼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에서 점점 멀어졌다. 기선이 클로짓 디나이얼 게이가 아니냐는 얘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재미있는 견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도 알지 못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지 않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중요한 퍼즐을 하나 못 찾은 거다. 그게 꽂아지면 완성되거나 다른 단계로 갈 수 있을 텐데, 그 한 조각이 없는 상태일 때에는 맴돌고 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기선은 기본적으로 의미가 딱 하나만 굳어져서 정해져 버리는 그런 것을 못 견디는 인물인 것 같다. 처음 시작은 분명히 타인의 외면, 표면, 얼굴 이런 것들이 주는 감정의 움직임, 정동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것들이다. 이 영화를 처음 만들 무렵은 나에게 있어서 다른 것들은 가능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전에 나에게 의미 있었던 것, 나를 움직였던 것, 전망 같은 것들이 기각되고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무엇이 남지? 라는 질문을 했던 시기였다. 앞으로는 더 많은 것들이 유효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런 질문을 이어 나갔을 때, 그래도 여전히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주었던 것은 누군가의 얼굴이었던 것 같다. 그 얼굴이 어떤 느낌이든 간에, 다른 존재의 얼굴이 주는 감정이라는 것은 많은 것들이 유효하지 않아도 남아있을 것 같은 대상이었다. 그것이 영화의 출발이었는데,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라는 것은 이러한 개별 인간이 타인에 대해 품는 마음, 인간만의 이 감정 조차도 포괄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그러면서 애초에 타인에 대해서 마음을 품었던 주체는 그 시스템 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 반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는 그런 인물이라는 차원에서 혜진이 필요했다.

이도훈 나는 처음에 제목만을 보고 이 영화가 얼굴들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감정을 강하게 전달할 거라고 생각했다. 초상사진처럼 프레임 안에 얼굴이 가득 들어찰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정작 영화는 풀샷에 가깝게 인물들을 찍었다. 때문에 그 인물이 가진 감정, 정서가 희석된다. 제목과는 괴리된다는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는 제목을 다르게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인 ‘possible faces’, 문자 그대로 생각해보면 굉장히 다양한 여러 얼굴이 존재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시스템에서 암묵적으로 강제하고 있는 표준적이고 전형적인 얼굴을 말하는게 아닐까 했다.

이강현 그게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전 위에 은박지를 대고 긁었을 때 떠내어지는 그런 전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은 나의 이전작업들에서도 있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제작하는 시작에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원판을 돌렸을 때 빙빙 돌다가 딱 맞아 들어가는 그런 형태가 아닌 것, 조금 더 감정이 물컹하고 물씬 풍기는 그런 것들을 처음에는 구상했는데 그런 것이 하는 과정에서 나에게 안 맞고 밀려나고 그랬다.

이도훈 혜진과 주영이 새로 보수된 성곽의 벽면을 보면서 그 차이를 지적하는 장면이 있다. 원래의 벽이 서로 다른 모양의 돌로 불규칙적으로 축조되었다면 위로 올라가 복원된 벽은 다 비슷한 돌로 규칙적으로 축조되어 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점점 더 판에 박힌 블록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느꼈다.

이한범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것이 무언가를 표상한다기보다는 이 영화 자체의, 또 그 핵심이 되는 인물들의 감정이 펼쳐 발라진 조형성에 대한 심상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영화를 봤을 때,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문제보다도 그러한 조형성에 대해서 계속 느끼게 된다. 인물들의 행동이 어떻게 배치되는가, 또 그들의 감정과 관계들을 어떤 두께로 쌓아 올리는가 등등 말이다. 이러한 조형성은 결국 인물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 같고, 그것이 이 영화의 서사성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도훈씨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데, 각각의 인물들은 사회의 전형성을 보여주거나 무언가를 표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유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보여줌으로써 감정의 원인을 암시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관계 안에서 행동이 발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훨씬 더 인물의 고유함을 보여주려 했다고 생각한다. 얼굴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 이 영화는 여러가지 재현의 매체와 관련된 보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얼굴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이 영화 자체가 얼굴을 보여주는 것, 또 그 재현의 화면이 나오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환기되는 CCTV의 시선, 그리고 흥미로웠던 것은 사람들이 TV를 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멀리 있는 것을 보는(tele-vision) 그런 행위의 상황과 이미지. 어떤 한 대상을 보는 방식들에 대해서 계속 예민하게 환기시킨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사진으로 드러난 얼굴에 대한 입장이다. 영화 안에서는 그것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생각했다. 첫 부분에 기선이 사진 기사와 함께 학생들의 졸업사진을 슬라이드로 함께 본다. 사진 기사는 사진들을 통해 아이들을 분류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데, 가장 마지막에 진수의 사진이 나오면서 기선의 관심을 끈다. 그 사진은 여타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찍힌 사진이었다.

이강현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사진이든, TV든 미디어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특히 내가 가장 영감을 많이 받는 TV프로그램은 시청률 안 나오는 시간대의 프로그램들이다. 예를 들면 기념식 생중계같은 것들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이나 <다큐 3일> 등 아주 전형적인 TV 다큐같은 것들도 있다. 아니면 문화적인 것을 다루는 프로그램들에 관심이 있다. 주말에 놀러갈 만한 장소를 살롱같은 곳에서 소개 해 준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 프로그램들이 평균치의 감성들과 평균의 삶에 대해 소개하고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우리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파해주는. 무엇이 무엇을 모사했는지 애매한 것들 아닌가. TV가 실제 삶을 모사했는지, 실제 삶이 TV를 모사하는지 알 수 없는, 혹은 다른 삶은 가능한 건지 잘 모르게 만드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쨌든 사람들이 움직이는 감정의 자장들이라고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차 말하지만 저 부박한 대상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진동들이 소중하다. 거기서 가능한 다른 것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인 것 같다.

이도훈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것 중 하나는, 현수가 조화 꽃시장에 물건을 받으러 갔다가 ‘조화가 생각보다 예쁘네요’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씬으로 꽃병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 생화의 아름다움을 따르는,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보에 실릴 이미지를 위해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그렇게 평균적인 미적 감각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아 나간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두 씬을 붙여 놓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강현 사보 촬영과 관련된 이미지, 그리고 기선이 마치 시 낭송하듯 읽는 글귀들은 실제 여러 사보들을 내가 보면서 짜집기한 것들이다. 은행에 가면 기다리면서 보라고 잔뜩 쌓아 놓은 것들이 사보이지 않나. 그런 형태로 제공되는 사보라는 것은 ‘너의 삶을 이렇게 구성해라’ 하며 그 삶을 제시한다. 인상깊었던 사보 중 하나가 명화들을 스튜디오에서 재현하고 그것을 표지 시리즈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보가 문화적 소양을 제공한다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사보가 얘기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삶도 명화 속의 장면처럼 아름답게 재현해 보세요’ 였다. 그렇게 제공된 것들로 영위되는 삶이라는 것이 마치 조화도매상가의 풍경과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현수의 대사와 같지 않았나 싶다. 죽지도 않고 영구적이라는 것.. 그 말 자체를 얘기하고 싶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그 공간에서 말해지는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중적인 감각.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좋은 거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 말이다.

이도훈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강현 그럴 수도 있겠다.

이도훈 우리가 시스템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시스템 안에서 요구하는 아름다운 삶의 감각, 교양, 지식이 있을 것이고, 또 그런 것들을 제공하는 미디어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것에서 조금씩 벗어나려고 시도하거나 충돌하려 한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기만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좋은 삶에 대한 방식을 찾아나가는 과도기라고 볼 수도 있을까?

이강현 아름다운 것들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결국 ‘의미’일 것이다. 기선이 의미라는 것에 대해 놀라움, 공포스러움, 생경함의 표정을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혜진은 사실 그런 질문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혜진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도훈 혜진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것들을 맛보고, 맛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조미료를 다 찍어 먹어 본다. 나는 혜진이 이 둘 사이를 왕복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강현 혜진은, 이미 그 삶은 질문할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다. 기선은 아직 미욱하기 때문에 질문을 하고.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아직 미욱하고, 현명하지 못해 삶에 대해 어쩔 줄 몰라 하기 때문에 그 질문을 하게 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는데, 혜진은 그의 삶의 기틀이, 이미 구체적인 것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다. 그렇다고 혜진이 좌절하게 되는 순간, 구멍에 빠질 것 같은 순간이 없냐 하면 그건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자기만의 리듬으로 앞으로 잘 헤쳐 나아가는 것이다.

이도훈 혜진은 자신의 삶을 설계도 하고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게도 이러이러하게 리모델링을 직접 하고 싶다라고 주장하지 않나. 그에 반해 기선은 여러가지 시도를 하지만 자신의 삶을 설계를 하지는 못하는 사람으로 대비되었다.

이강현 근본적인 질문은 기선이 하는 것 같지만, 그 질문을 미욱하고 어리석은 자리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한범 영화의 초반에, 혜진이 일기를 쓰는 장면이 나온다. 6월 어느 날의 날짜를 쓰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다”라고 노트에 한 줄을 쓴다. 그런데 그 한 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영화의 후반부에도 똑같이 일기를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10월의 날짜가 적힌 밑으로 “곧 새로운 계절이다”를 쓴다. 그리고 긍정적인 희망의 다짐들을 몇 줄 더 힘을 주어 적어 내려간다. 나는 이 두 씬이 영화 안에서의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자 혜진이 가지고 있는 삶의 운동성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단위의 막막함에서 계절이 바뀌며 생겨나는 삶에 대한 의지들, 물론 그것은 엄청난 변화를 불러 온다거나 대단한 성취를 주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영화의 마지막, 길 위에서 자기의 장소를 찾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한 기선은 무척 대비되었다. 이 영화는 그런 복잡한 심정을 남겨둔 채 끝이 난다.

이강현 혜진이 글을 못 쓰다가 몇 줄을 더 쓰게 된 그러한 변화가 사실 혜진을 대표하는 것이고, 내가 혜진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형태다. 한 줄 써 낸 것이 대단한 얘길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일기를 열심히 쓰려고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쓸게 없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너무 뻔한 변화지만 작은 바람들로 한 줄이라도 더 채울 수 있는 것, 그걸 좋아했던 것 같다. 기선은 영화 끝날 때까지 여전히 그러고 있는 것이고…

이한범 기선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풋살 코치가 된 진수를 만나고, 진수와 함께 도시의 곳곳을 돌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눈다. 진수가 학생일 때는 기선은 진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진수는 대답하기만 했는데, 이 때 진수는 기선이 묻지 않아도 자기 얘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선생님은 나에 대해서 더이상 묻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기선처럼 급격하게 타인에 대한 마음의 쓰임이 바뀐 사람은 없다.

이강현 기선이 진수를 다시 찾아간 것은 전적으로 자기 의지가 아니다. 큰 틀에서 보면, 처음에 기선이 품었던 타인에 대한 열정은 실패한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진수를 찾아간 것은 시스템의 의지라는 것이다. 사보라는 것은 보통사람의 삶을 담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선이라는 주체는 분명 실패를 했지만 시스템이 ‘이런 것이 진짜야’라고 제시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행한다. 때문에 그 자리는 서걱거리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진수는 그것과 무관하게 오롯이 자신의 삶을 잘 이어 나가고 있다.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화 시키고 요약해서 제시하는 것에 대해 실제 삶의 주체들은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반적인 미디어에 대한 의문과 반감이 있는 것 같다. 삼조정관의 말을 전하는 그 남자가 “우리는 진짜를 원한다” 라고 말한다. 진짜라는 것을 상정하고, 진짜라는 것을 제공해주고.

이한범 그것을 스펙터클이라고 했을 때, 기선은 스펙터클에서 허둥거리고 있고 혜진은 스펙터클이 관장하는 이미지의 힘을 벗어나는 현실적인 힘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강현 스펙터클 안에 있고 그것을 벗어나 있고 그렇게 구분하기는 힘들 것 같다. 왜냐하면, 혜진같은 경우 그것을 벗어나서 초월적으로 극복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스펙터클이 침입할 틈이 없을 정도로 삶의 구체성이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이 자기 디테일로 채워져 있는 존재는 그 스펙터클을 자기의 리듬으로 가지고 놀 수도 있는 거다.

이한범 그 장면이 떠오른다. 혜진이 주영과 통화하면서 길을 지나갈 때, 로드맵을 만들기 위한 사진 촬영 자동차가 지나가고 자기 얼굴이 찍혔다는 것을 재밌다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쿨하게 ‘얼굴 지워주겠지 뭐’ 하면서 넘겨버리고 만다.

이강현 음악이 나오는 조명 장치 같은 신제품을 사서 방을 꾸미는 장면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가지고 노는 거다 그것을. 이미 꽉 찬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기선같은 경우 그 안에서 허우적댄다기 보다는 그냥 보는 거다. 그러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거다.

이도훈 삼조정관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보자. 이 시스템의 키를 가지고 있는 마스터, 그러나 등장하지 않는 인물. 나는 이전에 이 작품을 극장에서 처음 봤었는데, 이번에 개봉 버전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삼조정관이 등장한다고 생각했었다. 기선이 갤러리에서 삼조정관의 동료를 만나는 장면에서 내 기억으로는 그 인물의 모습이 나왔었는데 이번에는 프레임의 바깥에 있다.

이강현 바뀐 게 맞다. 어쨌든 영화라는 것이 최종본으로 가는 편집의 과정이니 최종본으로 얘기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 최종본이 가지고 있는 운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줌-인이 들어간 것인데, 그 공간은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갤러리이고. 삼조정관이 있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삼조정관이 아니니까 그 존재가 구체적인 이미지로 나오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도훈 삼조정관은 일종의 최종 심급같은 것일까?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결국 다다르지 못하는 성의 중심이나 만나지 못하는 법정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그런 대상 말이다. 시스템 안에서 계속 맴돌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시스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런 것을 삼조정관과 기선의 관계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이 부분은 인물이 직접 등장하는 이전 버전에서는 잘 느끼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강현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느낌이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한범 시스템에 대한 반대라거나 거부와 같은 단순한 논리는 아니다.

이강현 ‘시스템을 깨야 해, 맞서야 해’ 이렇게 명징하게 갈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눈 앞에 있는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느낌이 더 맞는 것 같다. 만약 시스템을 거부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을 받아들일 수 없어지지 않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암울하게, 어떻게 할 수 없는 우리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깨부수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한범 이 영화는 그 틈 사이의 얼굴들에 대한 것이겠다.

이강현 그렇다. 진수가 기선에 대해 쌩뚱맞아 하는 그런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진수가 보기에는 이 전체적인 상황이 우스워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생소해 하는 그런 시선을 말한다. 어떻게 보면 진수의 그 시선은 이 영화 전체를 우습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시선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물론 죽자사자 만들기는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말 소중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계속 생각한다. 오히려 그 전체를 훼손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한편에 크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훼손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 있다. <얼굴들>에서 진수가 기선을 역으로 바라봤을 때의 우스움과 연결될 것이다.

이한범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궁금했던 점이 있다. 이 영화에서 현재가 아닌 과거가 등장하는 장면이 딱 두 씬이 있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혜진과 기선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과 혜진이 직장 동료들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밥을 먹는 장면이다. 나는 이 두 씬이 왜 여기 들어가 있는지 의아했었다.

이강현 그 장면을 보고 났을 때 어떤 기분이 남았나? 역으로 물어보고 싶다.

이도훈 하루 종일 뒹굴고 싶다는 혜진의 말에서, 일상의 익숙한 감각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누적된 감각이랄까.

이강현 아마 영화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들만 남겨 놓았기에 그렇게 만든 것일 테다. 그것이 실제로 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순전히 이후의 몫이다. 이런 저런 다른 영화들을 봤을 때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를테면 시간의 경과라든지, 사건 사이의 합리적인 이유랄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이유라는 것이 그럴듯한 것으로부터 작동한다기보다는 해당 장면이 당도했을 때 그 해당 장면 안에서의 느낌, 감정, 힘, 그런 것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거나 튕겨 나가거나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나머지 것들은 나에게는 잉여였던 것 같다.

이한범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 부연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느끼는 것인가?

이강현 내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해당 장면에서 인물의 표정이랄지, 걸음걸이랄지, 그런 것들에 의해서 더 좌우되었던 것 같다. 말투랄지, 억양이랄지… 어쨌든 그런 고민의 결과로 나온 거다. 그 결과가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해서는 내 몫이 아니기에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한범 얘기를 나누면서 이 영화가 나는 조형적이라고 느꼈다고 했는데, 바로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한 것이었다. 화면 안에서의 인물들의 행위, 그리고 화면 그 자체가 이 영화의 서사성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은 수채화의 평면처럼 색이 면에 얇게 펴져 있는 그런 얕은 깊이감을 연상시킨다. 한편 이 영화를 인물들의 드라마의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듬성듬성 빈 곳이 많은 모자이크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즉 전체적으로 조망하자면 씬들 사이의 거리가 무척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갑자기 기선이 현수의 집 방 안에 들어가 같이 앉아있는 장면들 이라거나… 가운데 비어 있는 이야기들이 더 많이 보인다.

이강현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시나리오 쓸 때 재미있게 봤던 것이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 였다. 어떠한 곳에 당도한 자가 그곳에서 느낀 것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전체가 이루어진… 그런 게 좋았던 것 같다.

이한범 결국 이 영화에 대해 궁금증이 여럿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런 구성에서 오기 마련인 것 같다. 씬과 이야기 간의 거리가 멀 때, 또 조형성이 서사성의 근간이 될 때, 그럴 때의 감상은 여러 감각을 자극하고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는 의미 구성이 성공적으로 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조금 사소한 질문이 있다. 영화를 보면 씬들 간 행위가 반복되는 경우가 있다. 썬크림을 바르는 혜진과 진수, 또 혜진이 기선에게 신발끈 좀 묶고 다니라고 한 장면은 진수가 신발끈을 묶는 한 장면과 이어진다.

이강현 한 장면에서 이런 식으로 등장했던 행위가 다른 장면에서 다르게 등장하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나의 의도 이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신발끈 같은 경우 시나리오에 있던 부분이 아니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괜찮아 보여서 썼다. 그 두 신발끈 장면은 모두 각각의 배우의 애드리브였다. 나중에 보니 대구가 맞는 것 같고 해서.


 

이강현, 얼굴들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