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사물의 세계를 사유하는 무대

미술세계 2019년 2월호에 수록.

 

사변적 실재론, 그리고 객체 지향 존재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알려진 그레이엄 하만은 아트리뷰 2014년 9월호에 관계 없는 미술(Art Without Relations)이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를 발표한다. 인간 중심적인 의미 체계를 거부하고 그 바깥의 사물의 세계를 사유하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비관계적 미학(nonrelational aesthetics)에 대한 추구이다. 이 용어는 언뜻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적 미학’을 상기시키지만, 하만의 용법은 보다 보편적인 수준에서 적용되는 원칙으로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단호한 입장을 서술한다. 즉 사물이라고 이르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은 보다 작은 단위 요소들의 집합으로서 이해되거나 그가 “상향적 감소”라고 표현하는, 맥락으로의 환원과 효과를 통한 의미화로 이해되고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만이 반대하는 사물에의 접근법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무언가에 대하여 알아가는 ‘방법’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일컫는 정보가 산출된다. 그리하여 그가 겨냥하는 정확한 비판의 논점은 사물의 세계는 지식의 생성과는 무관하다는 것, 나아가 그것에 저항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 작품 또한 바로 그러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피력한다.

우리는 랑시에르를 비롯한 일련의 급진적 철학자들이 이와 같은 맥락에서 체계에 저항하는 사물의 세계를 옹호하는 미학을 주장했음을 알고 있다. 바디우가 명령과 명령의 운명에서 인용하는 베케트의 말은 이와 같은 태도에 발 디딘 예술가의 질문을 여실히 드러낸다. “내가 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만약 존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일 것인가? 내가 만약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말할 것인가?” 바디우는 이 질문들을 “모든 사물의 균형 또는 결정 불가능성을 위한 명령”으로 여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각을 일종의 ‘입장’으로 이해해야 하고 세계의 구성 ‘방법’으로서 접근해야 한다. 즉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며 왜 그러한 선택이 요청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발현된 형식을 따져보고 그 운동성이 놓이는 당대의 좌표와 유통되는 장(場)을 비평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트선재센터에서 2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 하루 한 번은 이에 대한 한 예시가 될 것이다. 전효경이 기획하고 김세은, 박민희, 정지현 세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일종의 풍경이다. 여기서 풍경이 뜻하는 바는 그것이 침묵의 가시성으로서 의미화의 전 단계에 정지해 있다는 것이며, 매개되고 상관되기를 요구하며 관계된 모든 요소들이 끊임없이 유동적인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하루 한 번을 관람하기 위해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마주치는 작품은 김세은의 대형 회화 무제(2018)다. 이 작품은 입구에 바투 붙어 비스듬하게 걸려 있고 가로로 긴 몸집을 이용해 입구를 거의 가로 막고 있어 그것을 돌아 나가기 전까지는 전시장 안쪽을 엿보기가 어렵다. 단순하지만 명료하게 그어진 선과 묽게 펼쳐 바른 면이 구성하는, 한눈에 모두 바라보기 힘든 길이의 화면은 전시장 바깥으로부터의 시각과 시간을 차단하면서 그 너머의 공간에 놓여 있을 조형 세계의 시각적 프로그램을 암시하는 듯하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가느다란 철 파이프, 무제 바로 옆에 그와 한 쌍으로 놓여 묵묵히 인사를 건네는 정지현의 입구(2018)는 이미지의 감축, 깊이와 부피의 최소화를 통한 형식 요소들의 능동적인 재배치의 인터페이스, 이야기를 제거한 구조에서 발현되는 서사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 재생산의 원칙을 부연한다.

김세은의 회화와 정지현의 조각에서 전개되는 조형은 형식적으로 유사하다. 우리는 그것을 선과 면, 두께와 틈의 측면에서 접근해볼 수 있다. 김세은의 작품에서 선은 판단의 수행처럼 보이는데, 즉 방향과 속도, 길이에 대한 단호한 결정을 화면에 축적하는 것이다. 때문에 독립적인 개체라는 인상이 강하며, 따라서 언뜻 특정한 풍경과 그 안의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윤곽선처럼 보일 수 있지만 역으로 그 대상을 발생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에 비해 면은 붓의 질감이 거칠게 드러날 만큼 얇게 펴 발려 있다. 때문에 구성된 형상의 해상도가 낮고, 다른 구성 요소들과의 느슨한 중첩이 가시적이다. 자세히 보면 붓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지체의 면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여백이라기보다 화면 구성의 다른 방식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그 물질성이 여타의 색면과 밀도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지현은 첫번째 로타리(2018)와 그 사이에 위치한 라운드 오프(2018)에서 철재와 알루미늄 같은 산업 재료들을 사용하여 단순한 골조만을 접합한 조각을 통해 형상을 불러 세운다. 한편 그의 작업에서 면은 더블 데커의 펄럭거리는 반투명 천처럼 연약하거나, 여인 조각상의 표면의 요철만을 본 떠 낸 공공조각파일의 알루미늄 망처럼 무척 성기거나, 미니멀리즘의 기하학적 구조를 연상시키는 벤치(2018)의 가운데 부분처럼 제거되어 있다. 양파산처럼 육중함을 과시하는 절단된 색면은 벽면에 바싹 붙어 배경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정지현의 조각은 공간을 지지체 삼으며 김세은의 회화와 같이 다른 구성 요소가 비치는 얇고 성긴 표면과 지지체 자체를 투과시키는 구조를 조형하며 관람의 동선을 제안하고 시각적 리듬을 결정한다. 이와 같은 조형 프로그램은 천장에 설치된 15개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도 해당된다. 전통 가곡을 한바탕으로 연주할 때의 규칙에 따라 스코어를 만들고 70분의 지속 동안 금속성 물체가 부딪히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염소의 울음소리 등 정체가 불분명한 서로 다른 다섯 음가를 드문드문 배치한 박민희의 사운드 작업 가곡실격: 한바탕 또한 이야기 없이 구조의 규칙만으로 유지되는 형식적 요소들의 몸체이다.

세 작가들의 작업에서 감정과 이야기가 거의 지각되지 못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인데, 그보다는 능숙하게 표면을 떠내고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감소의 인터페이스가 더 강조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다루는 매체의 재료로 지탱 가능한 최소한의 단위까지 특정한 대상을 해체하고 스스로의 유연한 규칙에 따라 최소한의 수준으로 식별 가능한 형상과 구조를 재구축한다. 전봉준 동상의 왼손을 본 떠내어 겹쳐 놓은 정지현의 공공의 손 모음은 그렇게 전시장에서 위트 있는 구두점이 된다. 이들의 조형을 통해 하루 한 번은 의미론이 아닌 구문론에 입각한 경험의 원칙을 생성한다. 즉 합리성을 따르는 의미의 덩어리의 배치가 아니라 형식적 관계만으로 유지되는 최소단위의 임의적인 집합적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시 자체가 요소들 간의 위계가 사라진 데이터베이스적 상태가 되며, 그 요소들은 언제든 또 다른 규칙에 따라 재배치되고 대체될 수 있게 된다. 그것의 전제는 언제나 새로운 합의와 협상이고, 달리 말하면 합의와 협상은 구문론적인 의미 구성이 서사성을 발현시킬 수 있게 되는 원천이다. 투과 가능한 표면(없음)과 앙상한 구조의 규칙은 무한한 이야기가 가능한 다공성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이와 같은 감소의 인터페이스를 당대적 시각성의 발현으로 가정할 수 있다면(오늘날의 시각성을 탐구하는 대부분의 재현은 반대로 과장을 통해 표현한다), 요소들 간의 능동적인 협상과 새로운 규칙의 합의, 그리고 유연한 자리 이동으로 이루어지는 교차는 예술의 자율성 아래 수행되는 서사의 생산과 사물에 대한 경험의 모델이자 보다 전술적인(tactical) 형(形)의 정치일 수 있다.

이와 같은 미학적 실천의 탈환이 결국 서사성의 문제로 귀결된다면 이 전시가 연극의 상황을 상정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박민희의 가곡실격: 한바탕의 지속 시간에 맞춰 하루 한 번은 70분을 한 회 관람 시간으로 상정한다. 70분 중 60분은 일반 전시 관람의 관습을 따르다가, 이후 10분간 전시장의 불이 갑자기 꺼지고 오직 사운드에만 집중하게 되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러한 무대적 장치 때문에 ‘연극적’이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 불화하는 조형의 대화에 집중하여 참여하기를 바라는 요청일 것이다. 사물의 세계를 지지하는 미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예술의 연극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데, 하만은 앞서 언급한 글에서 연극적인 것이 바로 비관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연극은 단지 무엇이 상연되는지를 ‘보는’ 장소가 아니라 연기자의 미메시스를 통해 그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환언하자면, 연극은 우리 또한 바로 그 사물의 세계의 구성 요소가 되기를 종용하는 몰입의 기제다. 이런 맥락에서 전시 기간 동안 총 다섯 번에 걸쳐 진행된 박민희의 퍼포먼스 가곡실격: 한바탕에 대한 관리는 다소 아쉽다. 그 이유는 이 과묵한 사물의 세계에 인간의 신체가 들어왔을 때, 공연을 하는 신체와 보는 신체가 하나 둘 늘어갈 때 굴절되고 밀도가 달라지는 합의의 상태에 대해 섬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미묘한 오차만으로도 우리는 미궁에 빠지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읽기 위해 애쓰는 관객의 자리로 후퇴한다.

전시를 떠나서, 사실 내게 의미심장하게 여겨진 것 중 하나는 정지현과 김세은이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자 결정했던 대상이었다. 그들이 감지하는 것은 정상적인 평균의 풍경과 조화되지 못하는 사물이거나 무언가로 대표되지 못하는 삶의 반경 안 열외의 장소다. 정지현은 ‘도시의 부산물과 폐기된 자재’를 ‘사건의 시작’으로 삼아 사물의 질서를 조정해 나간다고 말한다. 김세은은 계획된 도시의 잉여로 남은 ‘이름 없는 공간’을 바라보고 그 각인된 심상을 화면 안에 새로이 구성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예술의 자율성의 문제란 사실 너무나도 복잡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체되고 재배치된 감소의 조형이 서사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실 형식과 규칙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대의 풍경에 대한 시각적 경험의 공유와 삶의 양식에 대한 마음의 공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물이라고 하는 허구적 실재의 정치학은 삶의 실제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실제성이 담보되지 않은 재배치는 단지 급진성을 모방하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루 한 번이 열리는 기간 동안 리슨투더시티가 매 년 진행하는 도시영화제가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렸다. 올해의 프로그램은 용산 참사 10주기를 맞이하여 짜였고, 다른 한편 그것은 서울시의 청계천 재개발에 대응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직접적이고 참혹한 이미지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 또한 이 거대한 도시의 서사에서 열외 되고 잊히고 가려지는 그런 이미지다. 이 이미지는 또렷하고 선명하게 발화하고 행동하길 요구한다. 그러한 시급성은 분명히 요청되고 있다. 나는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두 장소에서 있었던, 같은 시공간의 풍경을 마주하지만 상반된 방향으로 정향하는 예술적 실천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예술이 놓여 있는 장 자체다. 그리고 우리는 나름의 속도로 이 풍경을 가로지르고 있다.


 

하루 한번(2018, 아트선재센터)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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