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구두점, 촉각, 목소리, 유령, 행간

귀거나 꼬리(서울시 용산구 청파로 49길 12-5, 2020) 전시장에 오디오 북으로 제작되어 비치된 된 글.
텍스트 낭독: 이한범, 최태현

 

나는 언젠가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내가 참여했던 협업에 관한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출판물에 실릴 예정이었고, 책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글의 제목은 위트와 구두점이다.

“마가렛 에드슨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위트(Wit, 2001)의 주인공은 17세기의 형이상학파에 속했던 시인 존 던(John Donne)에 대한 권위자 비비언 베어링 교수다. 그는 영화 속에서 난소암말기 판정을 받지만 사뭇 의연한데, 죽음의 문제에 깊이 천착한 거룩한 소네트(Holy Sonnet)의 연구자로서 삶과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여기 때문이다. 형이상학파는 ‘죽음’처럼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들에 문학이라는 방식을 통해 육박해 나아갔고 이를 마주하고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기지로서 위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위트는 일종의 삶의 방법이자 문학의 방법이었다.

이 영화의 초반부 베어링이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애쉬포드를 회상하는 장면에는 위트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이 등장한다. 애쉬포드는 존 던의 거룩한 소네트 6번에 대해서 쓴 베어링의 에세이에 대해 그가 잘못된 판본을 참고했음을 지적한다. 애쉬포드는 베어링이 참고한 판본(A)과 가드너 판본(B)의 마지막문장을 비교한다.
 
A: And Death shall be nomore; Death, thou shalt die!
B: And death shall be nomore, Death thou shalt die.
 
두 판본은 철자는 완전히 같지만 구두점과 대소문자의 사용만이 다르다. 그러나 애쉬포드는 A 판본이 죽음과 삶의 긴장을 주시하고 그 형이상학적 문제를 넘어서려는 분투, 지성과 문학의 힘이라는 이 시의 핵심을 완전히 놓치고 있으며 단지 죽음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죽음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반면 가드너 판본에서는 구두점, 오직 한 번의 숨, 즉 하나의 쉼표만이 사용된다. A가 무대 위에서 ‘죽음을 외치는(!) 연기자’라면, B는 ‘삶, 죽음, 영혼, 신, 그리고 과거와 현재는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번의 쉼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이다. 베어링은 이를 형이상학적 기상(metaphysical conceit), 즉 수사학이라고 이해하지만, 애쉬포드는 그것은 위트가 아니라 진리(truth)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에게 도서관에 돌아가지 말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즐기기를 당부한다.

세계 안의 어떤 대상은 의미를 가진 언어 요소들의 조합만으로는 그 실체를 드러내기가 어렵다. 어쩌면 그러한 대상은 구두점을 끊임없이 새로이 배치함으로써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구두점은 요소들 간의 관계를 재정의 하고, 동시에 유동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에게는 의미론으로 구성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의 진리를 사유하기 위한, 삶과 사회의 분할을 위한 구두점을 어디에 놓고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공동의 조정이 필요하다.“

나의 오랜 관심은 예술 작품의 의미가 만들어지고 수용되는 대안적 모델과 방법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의미론을 구성하는 언어 요소들의 조합만으로는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대상을 어떻게 만들고 또 인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대안이라는 표현은 현재를 구성하는 담론과 그 계보에 대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그 구조의 바깥을 상상함을 뜻한다. 하지만 나에게 저 질문은 대안적 지각 모델에 대한 저항의 요구이기도 하면서도, 사실은 한 면에서는 당위적인 것에 가깝다. 그것은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등장했던 시대와 그 시대의 주체를 해석하는 벤야민의 비평과 공명한다. 벤야민은 영화를 수용하는 방식이 건축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하고 분산적 지각이라는 관람 주체에 대해 설명한다.

“촉각적인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습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건축에서는 심지어 습관이 시각적 수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시각적 수용 역시 긴장된 관찰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심코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처럼 건축물을 통해 형성되는 수용방법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규범적 가치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의 전환기에 인간 지각기관에 부여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서는 전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에, 즉 습관을 통해 점차적으로 극복된다.”

우리는 일군의 예술 담론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이와 같은 분산적 지각이 가능한 해방적 공간으로 열렬히 홍보해 온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성공적일 만큼 정치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고 몸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며 분산적 지각의 기억을 구축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무언가가 더 필요해 보인다. 가시적인 것들의 몽타주를 초과하는 무언가가 말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방법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그 방법을 하나의 집합으로 생각했을 때, 그 집합 안에 포함될 끝없는 계열체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이 집합은 아마도,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의 체계에서는 비실재하는 것이거나 열등한 것이거나 정의 불가능한 것들, 자본주의 하에서는 무용하고 가치없고 감각되지 않는, 그러나 바로 그 시스템에 혼란을 초래할 것들의 목록일 것이다. 이 목록은 이분법에 기반한 사고방식을 해체하기 위해 진력하고, 일련의 대립을 유용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소리와 목소리는 그리하여 데리다에게 존재와 의미를 규정하는 기호 체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는 방법이다.

“진리에 관한 모든 형이상학적 규정과,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적 존재론-신학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호소하는 진리의 규정은, 로고스의 법정이나 로고스의 계보 속에서 사유되는 이성의 법정과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로고스 속에서 소리와의 근원적이며 본질적인 관계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 소리의 본질은 로고스로서의 ‘사유’ 속에서 ‘의미’와 관계를 맺고 그것을 산출하고, 수용하고, 발화하고, 재결집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근접해 있다…목소리를 정신 또는 기의화된 의미의 사유와 굳게 결합시키는, 게다가 소리를 사물에 연결시키는 것에 견주어 모든 기표가, 무엇보다도 문자로 적힌 기표가 파생된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기술적이며 대리적, 재현적일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구성적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기의의 질서는 결코 기표의 질서와 동시대적이지 않으며, 기껏해야 기표의 질서의 이면이거나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교묘하게 어긋난 평행(숨결의 시간)이다… 기의의 형식적 본질은 현정성이며 소리로서의 로고스에 대해서 기의가 갖는 근접성의 특권은 현전성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유령이라는 이름이 출몰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상과 형상이 아닌 것과의 관계가 불분명한, 그리고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에서만 경험되는 바로 그 이름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유령은 언제나 물질적이다. 물질적인 것으로서만 출몰하는 유령. 마크 피셔가 말하는 ‘으스스함’은 이 유령과 긴밀하게 관련된다.

“으스스한 것은 부재의 오류 혹은 존재의 오류로 구성된다. 으스스한 감각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혹은 무언가 있어야만 할 때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어떤 일이, 왜 벌어졌는가?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 의미나 의도를 분석할 수 없는 구조물들은 또 다른 부류의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스톤헨지에 놓여 있는 환상열석이나 이스터 섬의 석상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또 다른 의문들에 직면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 구조물들을 창조한 이들이 왜 사라졌는지가 아니라 사라진 무엇의 본질이다. 어떤 존재가 이 구조물들을 창조했을까? 우리와 어느 정도 유사했으며 어느 정도나 이질적이었을까? 이런 존재가 속한 상징적 체계는 어떤 것이었으며 그들이 세운 이런 기념물은 그 상징 체계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왜냐하면 이런 기념물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상징적 구조물들은 쇠퇴했으며,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는 바는 실재하는 것 그 자체의 난해함과 불가사의이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이나 스톤헨지와 마주하게 되면, 현재 우리 문화의 유물들이 속해 있는 기호학적 시스템이 소멸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보일는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의 세계를 기이한 흔적들의 집합지로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으스스함’은 일종의 효과이다. 효과라는 말은 모종의 구체적인 사물, 상황이 힘을 발휘하여 관찰자인 ‘나’에게 변화를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에 관해서라면, 바로 이러한 수행적 힘이 중요하다고 여긴 깊은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 힘이란 사실 비가시적인 것이고, 그 힘이 작용하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사건은 지각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는 대체로 그것을 다룰만한 생각의 방식이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의 사변능력은 우리의 감각 기관에 주어진 사물과 상황에 대한 끝없는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이성의 방법으로 사유 불가능한 어떤 뒤편의 차원을 어슴어슴 드러낼 것이다. 우리 곁에 늘 함께 있지만 존재를 잊고 지냈던 유령들. 빌렘 플루서의 ‘몸짓’에 대한 관심은 이와 겹친다.

“‘기분’이라는 말에 관해서라면, 내가 그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것이 ‘이성’과는 다른 무엇을 가리킨다는 것을 나는 안다. 또 내가 ‘이성’의 의미를 대강 알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부정에 의해서 ‘기분’에 대해 아는 것이면 충분하다. 따라서 나는 몸짓으로 변환된 기분인 정동에 대한 관찰을 계속할 수 있다. 이 관찰은 두 개의 쟁점 주위로 타원을 그리며 맴돌게 되는데, ‘상징적 나타냄’과 ‘이성이 아닌 어떤 것’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서, 내가 특정한 몸짓을 이성이 아닌 어떤 것으로 해석할 때, 나는 정동과 마주하는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말은, 이러한 관찰 방식 속에서 ‘예술’과 ‘정동’이 서로 뒤섞이는 예술의 경험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볼 때, 나는 그것을 이성이 아닌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응결된 몸짓이라고 해석하지 않는가? 또한 예술가란 이성(과학, 철학 등)이 표명할 수 없거나, 같은 방식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어떤 것을 표명하거나 표출하는 사람이 아닌가? 이제, 내가 낭만주의에 가까운 태도로 예술과 정동이 서로 섞이는 것에 찬성하든, 혹은 고전주의에 가까운 태도로 그것을 거부하든, 정동이 윤리의 문제가 아니고 인식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미학적 문제를 던진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어떤 기분의 나타냄이 기만적인지 아닌지가 아니고, 나타낸 기분이 진실을 담을 수 있는지 아닌지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관찰자의 마음을 움직이느냐 아니냐이다.”

단단히 고정되고 견고하며 확고한 표상과 의미 체계를 어떻게 비껴갈 수 있을까 상상하기 위해 가시성의 바깥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나는 다시 물질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가시적인 것을 외면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다시 돌아오며 나는 물질의 개념을 보다 확장시킨다. 목소리와, 시간과, 공간과, 사물들 사이에 놓인 호흡이 덩어리진 것으로서의 물질. 이 물질의 시퀀스를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결국 사물들의 재배치와 재생산과 긴급한 관련을 맺게 된다. 사물이 보이는 다른 방식에 대하여, 그리고 사물과 사물과 사물들의 관계 맺기 방식에 대하여.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의 재발명을 통해 사랑을 보호하는 것도 철학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 임무는 나에게 이렇게 전유된다. 서사의 재발명을 통해 서사를 보호하는 것이 비평의 임무 혹은 예술의 임무라고 말이다.

“이것은 무언가를 단순히 보존하기 위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세계는 사실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사랑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혁신 속에서 취해져야만 할 것입니다. 안전과 안락에 대항하여 위험과 모험을 다시 창안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비평이라는 단어가 서양철학의 한 용어로서 등장했을 때 그것이 의미했던 것은 앎의 한계에 관한 연구, 정확히 말해 가정할 수도 없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의 한계에 관한 연구였다. 비평이 이와 같이 앎의 경계를 추적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앞에 ”진실의 세계“를 ”자연이 불변의 경계 속에 가두는 하나의 섬“으로 펼쳐 보인다면, 비평은 어쨌든 ”폭풍우에 휩싸인 드넓은 대서양“의 끊임없는 유혹에, 항해사를 그가 거부할 수도 없고 끝낼 수도 없는 모험 속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 ”범세계적 발전의 시학“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 속에서 시와 비평철학 사이의 구분 자체를 폐지시키려고 했던 예나의 학자들에게 당당히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이란 그 안에 비평 자체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즉 작품 안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을 본질적인 내용으로 하는 비평을 의미했다.”

나에게 있어 이러한 작업들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는, 아감벤의 말처럼, 비평의 개념을 시와 철학이 근본적으로 분리되기 이전으로 회복시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감벤은 ‘행간’을 바라보며 한 시인의 말을 빌린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드는 사람만이 가장 원대한 현실을 창조해낼 것이다.”


 

귀거나 꼬리(2020) 전시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