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유령적 그리기

고스트 샷건(시청각, 2019) 도록에 수록.

 

일리노이 주 어딘가의 오래된 저택에 버려진 인간 아이 티모시는 핼러윈을 맞아 전 세계에서 모여들 유령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다. 자신 또한 유령이 되길 간절히 기도하며,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소설 시월의 저택(From The Dust Returned, 2001)의 주인공 소년은 ‘귀향 파티’를 기다린다. 마침내 핼러윈 이브가 되자 저택의 수십 개의 문과 창문이 열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천 개의 그림자가 한데 모여든다. 유령에게 어둠은 축복이고, 그들은 새벽이 오면 잠에 든다. 하지만 티모시는 자신이 유령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낮에 잠들 수 없음을 슬퍼한다. 유령과 인간은 각자의 사는 세계가 다르지만, 언제 어디에나 그 세계가 중첩된 시간과 공간은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 짙게 스며 있는 것은 더 이상 유령이 살 수 없는, 아니 유령이 세계의 바깥으로 밀려나버리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아쉬움이다. 귀향 파티 이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유령들은 그들이 기쁨에 겨워 살아갈 장소는 사라지고 이제 “세상이 자신들에게 가혹한 곳이 되었음을 곱씹으며” 서로 껴안고 슬퍼한다. 언제 다시 모일지 선뜻 기약하지 못하며.

유령은 어둠의 시간에 찾아온다. 어둠은 살아 있고 보이는 존재들 바깥이 호명되기 위한 조건이다. 언제부터 그 바깥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 또 제거하고 박멸할 것이 되었는지는 어림잡을 뿐이지만 말이다. 어둠은 가시적인 무언가를 감추는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시성 아래 웅크리고 있던 다른 존재들과 허구를 불러 세운다. 달리 말하면 어둠은 허구를 실재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물론 빛 그 자체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유령이 살아가기 가혹한 곳이란 어떤 장소일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세계가 낱낱이 촘촘하게 밝혀져서 어둠이 점점 디딜 틈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게 된 세계를 말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상상하고 그것을 곁에 두기를 그만두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유령과 같은 것들의 배제는 특정한 구조의 역사 안에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유령과 어둠이 권력과 위계를 재조정하기 위한 방법, 혹은 서로 접합될 수 없는 상이한 규범이 공존할 수 있는 합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의 억압이 무엇을 더욱 공고히 하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최근의 서울 미술에서 ‘유령’이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면에서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불러 오려 하는 것일까? 혹은, 우리 곁에서 사라진 부재의 자리를 감지하는 것일까? 여기서 ‘서울 미술’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서울이라는 장소에서 발생한 미술의 총체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장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특정 감성의 작동과 연관된 것을 이른다. 즉 서울은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는 강력한 힘의 이름이다. 유령은 한편으로는 박찬경이 불러온 ‘귀신’ 이후, 다른 한편으로는 ‘평평함(flatness)’과 ‘인터넷’ 이후 출몰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미술가의 삶과 생존에 대해 치열하게 육박했던 삶의 담론이 있다. 이들은 전혀 연관성 없이, 그저 서로 다른 미술의 주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모두 한국의 당대성에 대한 해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귀신’이 근대 역사의 축을 관통하며 불러 세워진 주변부와 망자들이라면 ‘평평함’과 ‘인터넷’은 디지털 매체 환경과 결부된 시각성, 그리고 기술과 가상의 세계, 이그러진 사회 속 주체의 사고 회로와 문화의 관계를 다룬다. 이것은 당대의 우리에게 흘레붙어 있는 찐득찐득한 조건들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비판적 미술의 여러 양태를 만들어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교집합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개념들 혹은 조건 안에서 단연 쉽게 도출되는 사실은, 귀신과 디지털에는 구체적으로 부여된 몸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들이 몸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면, 당신이 본 것은 그저 영매(medium)로 인해 투사된(projection) 영혼이거나 이미지였을 것이다. 아니면 영매 그 자체일 뿐이거나.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으로 홀린 듯 걸어가는 관성은 이렇게 서로 다른, 그러나 어쩌면 같은 목표, 즉 한국성에 천착하고 그것을 해체하며 비정상성을 회복하려는 미술의 영토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의 유산으로서의 ‘유령’을 접했을 때, 나는 그 유령이 구성된 장소로서의 실재 바깥을 환기시키고 호출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앞선 것들과 공명하지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길 바란다고 느꼈다. 그 방식이란 역사 혹은 기억을 위한 다른 서사와 형상을 만든다거나 가상의 공간을 지시하고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즉 물질화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정동적인 것에 가깝다. 즉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을 직접적으로 구체화하고 가시화하려 하기보다는 무언가를 대신 보여줌으로써 부재하는 것을 보이는 것 안에 기입한다. 해가 진 뒤 더욱 선명히 밝아오는 글로리홀과 람한의 물질적인 빛의 공간이었던 고스트 샷건은, 그렇게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주요하게 다룬 정동의 개념 중 하나인 으스스함(eerie)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크 피셔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The Weird and the Eerie, 2017)에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모두 기본적인 지각과 경험 너머의 바깥에 대한 매혹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피셔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 개념인 운하임리히(unheimlich)와 구분하는데, 후자의 경우 낯설음의 위치가 익숙한 것의 내부에 위치하며 그로 인해 낯익은 것 내부에서 불일치를 발생하게 한다면, 전자는 반대로 바깥에의 낯설음의 지각을 통해 내부를 인지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셔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또한 구분하는데, 기이한 것은 몽타주처럼,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이질적인 접합이 낯섦을 환기시키는 것이라면 으스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데 무언가가 있는 상황,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없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배치와 연관되어 있다. 이 둘의 더욱 명확한 구분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마주했을 때 발생하는 서로 다른 정서적 효과로부터 가능하다. 기이한 것이 주는 낯섦이 “우리가 기존에 차용하고 있던 개념과 생각의 구조가 더 이상 쓸모없어졌다는 신호”이고 “친숙하고 관습적인 무엇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을 보는” 충격(동시에 즐거움)을 준다면, 으스스한 것은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충격과는 달리 ‘고요’하다. 그것은 충격을 주기보다는 긴장하게 만들고, 추측하게 만든다.

사실 마크 피셔가 으스스한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으스스함이 발생하는 독특한 조건에 있다. 존재와 비존재의 배치 안에 잠재된 힘, 즉 도대체 누구로부터 발휘된 것인지 그것이 어떤 주체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다. 말하자면, 분명히 어떤 힘은 발생하고 있지만 그 힘은 흔적으로서만 존재하고 주체는 비가시적이라는 것이고, 피셔는 그 비가시적인 힘을 추적한다. 대부분의 장르 문학이나 공포 영화 등 서스펜스를 필수적으로 포함하는 문화 형식들은 그 비가시적인 힘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을, 즉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을 서사 안에 포함시킨다. 살인자가 결국 잡힌다거나, 모호했던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거나 하는 것 등 말이다. 때문에 책을 덮으며, 영화관을 나오며 우리는 고조된 으스스함이 말끔히 해소된 채 경쾌한 발걸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문화적 형식 중에서도 미술의 전시는 그러한 해소의 장치를 가지지 않은 서사 장치이다. 왜냐하면 전시는 그 자체로 실제 세계이자 세계의 등가물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어쩌면 그 자체로 으스스함을 위한 장소일지도 모른다. 바꾸어 말하면, 전시란 의미론적으로 조직되지 않는 전혀 다른 방식의 서사 체계이다.

어둑한 밤중 지붕 낮은 작은 방들 곳곳에서 휘황하게 스며 나오던 고스트 샷건의 현혹하는 빛들은 그 자체로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하지만 분명 그 빛은 어둠의 힘을 빌려 아주 잠시 동안만 내려앉은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 두고 간 혹은 일부러 흘려 놓고 가둬 둔 그 빛의 일렁거림은 강한 매혹의 힘과 비례하여 곧 사라질 것이라는 일시성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키며, 이리저리 나의 몸을 공간 안에서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나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든 그 힘에 대해서 생각한다. 단지 주어진 전시장의 길을 걸어보는 것이 아니라 도깨비불에 홀려 정처없이 배회하게 하는 그 힘에 대해서. 그것은 감상과는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 무언가를 찾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무엇을 찾아야 할지는 모르는 떠돎과 같다. 아마도 그 움직임은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선 경건함과 스크린의 구애가 넘쳐나는 길거리의 세속 사이 어드메에 있을 것이다. 움직임 속에서 빛을 둘러싼 존재와 부재의 오류 – 즉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눈앞에 놓여 있는 그런 으스스함이 파고를 달리하며 밀려온다.

유령을 부르는 것이 영매라면, 람한과 글로리홀은 자신이 다루는 예술적 매체가 무엇을 소환할 수 있는지를 상상한다. 즉, 일시적으로 가시화된 이 빛의 시간은 근본적으로 람한과 글로리홀이 자신이 다루는 매체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된다. 디지털 회화의 가상성이 필연적으로 발광을 요구한다면, 유리는 그 빛의 일시적인 거처가 된다. 서로가 자기 자신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그러짐과 불투명함을 만들어 내면서, 즉 빛의 물질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두 작가의 두 매체가 한데 뒤섞이며 그것은 공동의 ‘그리기’가 된다.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물리적인 공간을 지지체로 삼는, 그리고 그 사이를 배회하게 만드는 것을 경험의 양식으로 삼는 회화적인 것. 그리하여 사실 이 전시 고스트 샷건의 의미심장한 점은 예술적 매체를 둘러싼 지각의 체계를 당대적으로 갱신하는 과정에서의 세밀한 조정에 있다. 그것은 아득히 서로 먼 거리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두 매체의 ‘기괴한’ 몽타주에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의 매체가 가진 잠재성을 당대의 경험 양식과 전시라는 언어 체계 안에서 구조화하며 비가시적인 것과 가상을 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으스스한 것으로 되돌리는 선택들 말이다. 말하자면, 글로리홀과 람한의 선택의 우아함은 무언가를 손에 쥐고 소유하고 귀속시키지 않고 소유 불가능함에의 인정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인식 구조를 제안한다는 것에 있다. 우리가 이 전시에서 진정으로 경험했던 것은 유리의 물성도 유리에 맺힌 영롱한 빛도 그 뒤에 놓인 눈이 시리게 쨍한 그림도 아닌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부재의 증명을 더듬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여기서 본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그저 텅 빈 행간이었다고 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스트 샷건을 매체의 재발명을 통해 만들어진 일종의 회화의 장이라고 했을 때, 그 회화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님을 손쉽게 알 수 있다. 그보다 그것은 으스스함의 경험 구조이고, 이를 통해 앎의 대상을 사변(speculation)하게 만든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른 기능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또 그것이 작동하는 장 자체를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고스트 샷건»은 포스트-미디엄적 실천의 증언이기도 하다. 일찍이 뒤샹(Marcel Duchamp)은 회화라는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 보았다. 이름이 부여된다면 하나의 사물은 회화가 되고 예술 작품이 된다는 철학적 논리 과정을 통해 레디메이드라는 방법이 도출되게 된다. 이름 붙이기는 회화의 한 방법이 되었다. 그것은 W.J.T 미첼(W. J. T. Mitchell)이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을 경유해 말하는바 “언어가 회화를 비롯한 예술을 구성하는 상징체계의 모델을 제공한다”는 기호학적 관점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고스트 샷건이 내어놓은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유령적인 예술은 어떤 이름으로 존재하는가?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인가? 이름 없는 유령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한함의 신비주의와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유령을 하나의 회화적 방법으로 삼을 수 있는가? 즉, 정동은 어떻게 당대에 비평적으로 기입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