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미래에 앞선 이야기들

제 19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졸업전시 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2018) 홈페이지에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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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 과정 학생들의 19번째 졸업 전시를 보기 위해 미술원 건물 뒤편에 자리한 전통 문화 연수동으로 향했다. 학교 본부가 있는 캠퍼스에서 미술원으로 향하는 길은 아름답게 조경된 의릉을 끼고 있고 완만히 오르내리며 굽이져있는데, 그 풍경과 리듬은 내가 각별히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수도 없이 오고 갔을 연수동 건물로 올라가는 경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상한 각도로 몸을 숙인 채 다리에 힘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산한 기운이 스며 나오는 오래된 건물의 입구에는 서로 다른 네 개의 포스터가 한 몸으로 이어져 붙어 있다. 규칙 없이 배치된 디지털 그래픽 이미지 사이로 “Using-Future-Used-Already”라는 단어가 언뜻언뜻 보인다. “우리는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이 제목은 이수명이라는 한 시인의 시에서 발췌한 문장이라고 한다. 포스터는 전체적으로 주황색에서 시작해 파란색으로 끝나는 그라데이션이다.

1층에는 전시가 없고, 대신 안내 데스크에서 핫팩과 리플렛을 받았다. 대단한 추위를 무릅쓰고 전시를 관람했던 지난 몇년의 졸업 전시가 문득 떠올랐다. ‘늘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것’은 일종의 양식이 되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연함 같은 것이 깃든다. 그 표정만으로도 짐짓 추위는 누그러지기도 한다. 계단을 오르며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 어디서부터 전시를 볼까? 연수동은 각 층마다 10여개가 넘는 방들이 복도를 사이로 마주보며 두 열로 늘어서 있다. 한예종 졸전은 방 하나를 한 학생이 오롯이 사용하기 때문에 무척 많은 개인전이 모여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그것이 엄격히 정해진 규칙은 아니고, 매 번의 의지에 맞게 공간은 변한다. 가벽이 임시로 들어서기도 하고, 건물 밖 중앙정원을 관람의 동선을 사용하기도 하고, 두 명이 한 공간에서 함께 전시를 만들기도 한다. 올해는 김영민과 류지민이 투민이라는 이름으로, 정하슬린과 홍자영이 툴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공간을 꾸린 모양이다. 여하간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독립적이기 때문에 사실 어느 방을 먼저 들어가도 크게 다르진 않다. 길게 고민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사용한 ‘우리’라는 단어가 어딘가에 걸려 옷깃을 잡아당긴다. 그것이 분명 어떤 공동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나는 이 모든 내용과 형식과 질감들을 가로지르는 마음을 찾기 위해 부단해야 할 테다. 언뜻 이 공간에서 졸업 전시를 하는 것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가능한 많은 날 동안 이 전시를 반복해서 찾을 생각이었다. 물론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의 작업을 위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단지 보고, 기억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경험을 되돌아보면 작품이든 전시든 그것으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을 한 번씩은 열고 들어가 봐야 그때부터 기억에 연연하지 않는 감상이, 그러니까 내 생각의 가지가 뻗어 나가기 시작하는 감상이 시작된다.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이 가져온 변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기억에 대한 문제도 있을 것이다. 매체와 이미지가 나를 대신해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사유를 위한 여분의 힘을 좀 더 남겨두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따라 비평의 역할도 조금씩 이동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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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에 올라서 처음으로 마주한 방으로 들어갔다. 캔버스 화면 위에 가느다란 파란색 유성펜으로 네모를 계속해서 반복해서 그린 작업이 먼저 눈에 띈다. 중앙에서 시작한 작은 네모는 하나씩 더해질수록 그 크기가 커져간다. 혹은 그 반대일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일그러지고 때로는 다른 선을 침범하는 선들은 강박적인 규칙과 손의 노동 사이에서 말 그대로 진동한다. 주보람은 네모난 화면에는 네모를, 둥근 화면에는 동그라미를, 세모 화면에는 세모를 그렸다. 그의 강박은 프레임이다. 프레임은 언제나 시작이고 끝이지만, 그 안을 채우는 선의 움직임은 손의 시간성을 껴안으며 육화한다. 하나의 강박이 수도 없는 형태의 차이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그 형태에 매혹되었지만, 다른 한편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반대편 벽에 눈에 띄는 것은 캔버스에 젯소를 두껍게 바른 작업들이다. 선이 캔버스의 수평적 화면 위에서의 강박이라면, 겹쳐 바른 두께감은 수직적 강박 같다. 그것은 무언가를 그리지 않고 단지 표면을 덧씌움으로써만 생기는 차이들을 보여준다. 원칙상 이 선들과 두께는 무한히 반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강박과 형태 사이에서 손의 움직임을 멈춤으로써, 이미지의 표정이 생겨난다. 말하자면 이미지의 표정은 긴장의 관계 안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나는 방을 나서며 이미지의 표정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짙은 푸른 카페트가 크기에 맞게 견고하게 깔려 있는 방에서 사진들을 볼 때도 그 표정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벌어진 커튼 사이로 보이는 닳은 창틀의 쇳조각, 매듭지어진 새하얀 천에 묻은 보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자리한 멀리 놓인 집, 귓방울에 멍울진 살덩이같은 것들 말이다. 김한은은 큰 것 안에서 아주 작게 놓여 있는 점과 같은 것들을 보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대상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기쁨과 설렘을 잠시 정지시키는 것, 그러니까 사진에 대한 자신의 거리를 찾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마도 반 보 앞으로 갔다가 다시 몇 마디 뒤로 돌아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것 같다. 사실 그러한 사진적 거리는 대상을 마주했을 때의 판단일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삶의 단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표정이란 결국 정동적 효과가 아니라 형태와 사물들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것을 둘러싼 질서는 무엇일까?

박함초롬의 회화와 강동호의 회화는 언뜻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떤 형상, 특정하자면 문화적인 영역의 도상을 가져오고, 그것을 이그러뜨리고 번지도록 펴 바른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박함초롬이 형상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한다면, 강동호는 회화의 이미지를 보여주려 한다. 박함초롬의 형상이 이미지의 운동성에 대한 것이라면, 강동호의 운동성은 회화의 가시성이다. 때문의 박함초롬의 그림에는 서사적 공간이 생겨나고, 강동호의 그림에는 회화의 공간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박함초롬이 뭉근한 형상으로 이미지의 시간성을 찾고자 했다면, 단단해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칠해진 낮은 채도의 배경 위의 잘리고 뚫린 강동호의 형상은 평평함을 찾고자 한다. 강동호의 Suit의 왼쪽 위에 자그마하게 그려진 기하학적 평면 도형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표면으로 재귀하고자 하는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욕망과도 같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이미지를 통해 조형하고자 하는 질서는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3층의 아주 넓은 방에서 나는 한참 시간을 보냈는데, 덧발라지고 덧붙여진 물감이 어떤 풍경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들에 쉽게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톺아보아도 그것이 내게 어떤 얼굴을 내어보이는지 잘 알지 못했다. 보수공사를 알리는 펜스가 올라와 있듯 군데군데 가려져 있고 어물쩡 뭉개놓은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지인과 그림들에 대해서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화면 안에서 불확실한 의지를 가진 선들에 대해서 말했다. 확고한 선택에 의해 화면에 자리한 것이 아닌 것들이라고 가리키면서 말이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야기를 끝내고, 그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나는 임현지의 그림을 더 살펴보았다. 어쩌면 단호하지 못한 불안함이 나의 시간을 계속 잡아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잘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지지할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선택은 연결된다는,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한 선택을 하기를 종용하는 자기계발의 선전구호에 대해 혐오스러움과 피로를 느끼지만, 어떠한 현상에는 무수히 많은 비가시적인 원인이 연결되어 있다는 전체론에 대해서는 매혹을 느낀다. 언뜻 같은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자가 희극에 기뻐하고 비극에 놀란다면 후자는 그저 그것이 전부일 뿐이라는 무심함을 가진다. 이미지의 표정을 본다는 것은 구경꾼보다는 탐정의 몫일 것이다. 3층의 몇몇 방들을 미처 다 보지 못하고 학교를 빠져 나왔다. 겨울의 해는 멈춤 없이 짧아질 것만 같고, 어둠은 그만큼 호흡이 길어진다. 겨울과 어둠은 어쩐지 견디는 기분을 들게 만든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석이 있다. 물론 견딘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견디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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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보다는 이른 시간에 전시장을 찾아 왔다. 미술원 2층에는 두 개의 전시장이 있고, 한 전시장마다 네 명의 작업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꺼져 있었던 차현지의 작은 모니터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빛이 흘러 나와 다시 각목 구조물 사이로 허리를 숙여 들어갔다. 그 구조물은 자칫하면 부서질 것 같이 약해 보여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실패에서 그는 길거리 바닥에 흰 테이프로 네모를 그리고 그 위에 올라선다. 두 명의 발이 간신히 들어가는 크기다. 조금 더 큰 네모 안에서는 다리를 펴고 꼭 맞게 눕는다. 계속 바뀌는 자리들, 그러나 임시적이고 좁은 공간 위에서 가능한 움직임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의 삶을 제약하고 구성하는 힘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고백임과 동시에 비판이기도 하고, 증언임과 동시에 선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은 효과적이고 중요한 도구가 된다. 사적인 공간과 사회적인 공간을 측정하는 도구이자 점유하는 움직임, 시간을 기억하는 지면이자 기록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미묘한 마음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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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의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그린 집의 공간이 기묘했다. 단촐한 집은 언뜻 평화롭고 편안해 보인다. 따뜻한 불빛의 전구가 켜진 앞마당은 매우 좁은데, 그 뒤편처럼 보이는 풍성한 나무와 채소가 심겨진 밭은 넓게 펼쳐져 있다. 이러한 공간적인 왜곡은 조선 후기에 문인들에게 유행한 산수화의 공간을 생각나게 했다. 그 또한 구체적인 풍경에 대한 상상적인 투사였으며 마음의 지도였다. 나는 그처럼 유연하게 공간을 인식하는 것을 볼 때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낀다. ‘은신처’라 이름 붙여진 이 건축에는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견고하게 올라간 담장은 굳게 닫혀 내부와 외부를 확고하게 구분한다. 그 바깥, 그러니까 담장의 바깥은 단지 수평선만을 만들어낼 뿐인 삭막하고 텅 빈 추상화된 땅과 하늘이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가제본된 노트에는 “은신처가 사라질 수 있는 두 가지 경우”가 써진 페이지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은신처는 정신 속에 있기 때문에, 이 공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재앙은 두 가지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와 현실의 몸이 죽었을 때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 두 가지 경우를 위한 저만의 지침서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림들 사이에는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은 듯한 큰 크기의 드로잉이 걸려 있었는데, 그림 속의 집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가꾸어지고 기억되고 기록된 것이라 생각했다. 불쑥 초대받은 고마움을 뒤로하고 문을 나서며 문득 오지선의 그림이 떠올랐다. 온통 초록색뿐인, 아주 오래 전 공룡이 살던 시간일 것 같은 그런 풍경의 그림이었다. 그의 다른 그림에서도 유난히 초록색이 눈에 띄었는데, 나는 그 색이 그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 또한 그러했다. 온갖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사물과 동물이, 여러 계절과 풍경이 뒤섞인 동화 같은 공간이 큰 크기의 포스트잇에 연이어 그려진 그림이 바로 맞은편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기쁨이자 유희처럼 보였다.

김보원에 대한 인상은 그가 탐험가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바깥의 공간으로 향하는 힘이 그의 작업에 배어 있었다. 김보원은 디지털 가상공간이 과연 어떠한 세계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수치와 조건의 수식으로 상태가 변환되고 값이 정해지는 세계에서 나의 위치는 어떻게 조정되는가? 그리하여 내가 지각하는 당대의 세계는 어떻게 재구성되는가? 8개의 서로 다른 모니터 화면으로 구성된 설치 영상 Ffffaling은 임의로 설정된 무한의 가상공간 안에서 어떤 명령에 따라 끊임없이 ‘떨어지는’ 붉은 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무한한 공간 안에서의 움직임은 역으로 언제나 정지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가상공간의 온도, 부피, 무게가 없는 표면적인 속성과 세계의 좌표 중심으로서의 큐브를 빙하의 이미지를 통해 다루는 MirrorFfffaling과 한 쌍으로 놓인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적인 탐구의 손짓보다 흥미로운 것은 김보원이 전시라는 매체를 솜씨 좋게 사용하여 그러한 개념적 문제 인식에 엮인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는 점이다. 영상 작업이 놓인 반대편에는 전시 공간을 반으로 구분하며 김보원 자신이 번역한 가상현실의 풍경 회화 작업들이 있다. 이 인상적인 그림들 중 하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다. 유치원생이 그렸을법한 조약한 고양이의 모습 위로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애송이라고 생각해 스스로를 말이야” 나는 아직 이 문장이 정확히 무엇을 향하는지 모르지만, 김보원 자신이 가상공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등식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술원을 빠져 나와 연수동으로 가기 위해 출입문을 나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연수동 3층의 한 방에 창문을 꽉 채운 사진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다른 방들은 모두 검은 커튼이 처져 있거나 열려 있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에 눈에 무척 잘 띄었다. 큰 화분이 앞에 놓여 있고, 그 뒤로 여러 명의 남자가 서 있는 사진이다. 몇몇은 흰 마스크를 썼으며 누군가는 흰 머리띠를 하고 있다. 저들은 사진이 찍힐 당시 실제로 저 정도 높이가 되는 곳에 올라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만한, 점거를 상기시키는 이미지였다. 그들은 뭔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강현영의 작업이 전시되고 있는 방에는 바닥에 깔려 있는 타일 중 일부가 뜯어져 비스듬히 그러나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서 있었는데, 이 작업의 제목은 바리케이드였다. 이처럼 전시 장소를 특정적으로 이용해 환기시키는 것은 한쪽에는 사진 이미지를, 한쪽에는 기록 영상 이미지를 병치하고 인터뷰 내레이션을 덧입혀 상영 중인 2채널 영상 작업 속 시간과 상황이다. 사진과 기록 영상은 1970~80년대 즈음의 한국이 배경인 듯한데, 모두 어떤 건물에 대한 점거와 체포와 관련되어 있다. 사운드가 좋지 않아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알기 어려웠다. 이 작업이 특정한 사건에 대한 기억과 경험의 재구성 방식을 질문하는 것이라면, 그 관심은 결국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의 한 장면을 재편집한 최윤정의 모의법정은 이야기의 한 부분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재독하려 한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장면은 범죄를 저지른 한 여인을 변호하기 위해 다른 한 여성 변호사가 그 여인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재현하는 부분이다. 법정의 방청객들을 클로즈업하여 살펴보며 영상의 속도를 천천히 전개시키고, 극적인 연기자의 목소리로 변호인의 대사를 내레이션함으로서 이 상황은 과장되게 표현된다.

이주연의 다큐멘터리 골든 위크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도쿄에 사는 친구와 어느 날 좋은 낮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크림과 빙수를 말없이 먹는 모습을 360도 카메라로 촬영해 길게 보여준다. 불어오는 바람을 바라볼 수 있는, 완전히 열어젖혀진 그 공간은 그를 끈덕지게 잡고 있던 한국에서의 삶의 장소와 발 디딜 곳 없이 쓰레기가 쌓여 있는 도쿄의 좁은 방 모두를 비껴간다. 그 풍경은 수다한 삶의 구체성과는 그리 관계가 없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의 삶의 궤적은 바로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시차적으로 재구성된다. 시간과 공간 모두에 대한 시차 말이다. 그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지나간 시간을 응시하고, 그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유사 과학적 CG이미지나 교육용 자료의 도판 이미지, 시뮬레이션 게임의 이미지 등을 추론의 단서로 사용하며 삶의 기억을 비껴가는 서사를 회복시킨다. 나는 그 서사가 어떠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보다도 합당하고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미지들 자체가 그의 삶을 구성하는 힘이었음을 강변하는 것이자 이주연이 자신의 손발을 쭉 뻗어 운신하는 세계의 범위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몸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선택 이전에 이미 그 몸이 놓일 자리를 강요받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여전히 몸은 첨예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몸은 가능한 한 섬세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전시장을 쇼룸처럼 꾸민 이지원이나 강한 리듬의 음악을 강조하는 이지윤의 작업은 문화적 양식을 체화하여 소비하고 드러내는 신체를 전시한다. 이규진은 오히려 신체의 육체성과 그 경험에 집중한다. 전시장 가운데 놓여있는 유인물에는 너무 자주 터지던 코피에 대하여, 너무 잘 부러지던 이에 대하여, 그리고 무심코 바투 깎은 발톱이 안겨주었던 통증에 대하여 적혀 있다. 그 위로는 그저 살덩어리 같은,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두 눈밖에 없는 그런 형상이 프로젝션 된다. 이규진은 이 캐릭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여러 모니터에서 상영했다. 캐릭터 다섯 개가 둥그렇게 둘러 앉아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를 비어있는 앞의 캐릭터의 목 위로 옮겨 붙이기도 하고, 걸어가는 캐릭터 위로 손이 등장해 그 캐릭터의 모양을 뜯어내면 여러 붉은 색들이 모자이크된 내부가 비치기도 한다. 피부 아래의 속살은 벗어날 수 없는 몸의 취약함과 날 선 통증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면에 크게 프로젝션되는 애니메이션은 실제 사람의 굴곡진 몸 위를 배경으로 한다. 살갗 위에 영사되는 캐릭터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의 부피를 채워 넣게 되고 동시에 배경의 몸을 가르고 통과하며 일상적이고 반복적이었던 상처의 감각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강수민은 살의 물질성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해 회화와 조각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에게 예술적 매체는 추상화되고 표백된 신체의 구체성들을, 아브젝시옹을 다시 불러내는 도구이다. 동시에 이는 이미지에 저항하는 실존성과 질감에 대한 주장이기도 한데, 오늘날 회화와 조각이라는 장르가 반동적으로 빈번히 출몰하며 매체론을 갱신하려는 유행의 이유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과도한 스펙터클 안에서 촉각적인 것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진다.

슬슬 어둠이 내려앉을 기미가 보여 2층 복도 끝의 방으로 향했다. 화환을 장식하는 금색 모조 나뭇잎이 장식품처럼 여기저기 놓여 있던, 마네킹의 번쩍거리는 초록색 눈과 더불어 전시장을 정신없이 채우던 현란한 불빛의 공간이 다시 생각나서였다. 거기에는 우스꽝스럽게도 금색으로 도색된 크레이지 치킨이 안전제일 테이프를 테두리 삼아 어딘가에 바쳐져 있었다. 나는 문득 아주 오래 전 한 칼럼에서 읽었던 ‘세속적 안식일(secular sabbath)’라는 말이 생각났는데, 이 글에서 ‘세속적’이라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 반대되는 뜻으로 일주일에 하루쯤은 웹의 접속에서 벗어나보자고 주장하는 고리타분한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주장과는 별개로 이 단어의 조합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용어가 암시하는 이분법적 관념구조를 초과해 역으로 하나의 실재로 통합되고 물질화되려는 세계상에 대한 징후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네 개의 Daily Nirvana시리즈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곽지원은 우거진 숲 안에서 때밀이로 장식된 리어카에 물을 받아 여유롭게 목욕을 하고, 한밤중 공터의 가로등 주변을 뛰어 돌기도 하고, 카메라 앞에서 푸르게 음화시킨, 유리구슬을 눈에 끼워 보려는 움직임을 자신의 사진 이미지에 중첩시키며 이구아나로 변신해보고자 했다. 금색 커튼 아래 놓인 소형 텔레비전에는 흰색 보호복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두 사람이 뒤쪽으로 프로젝션 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춤동작을 따라 췄다.

삶을 다루며 삶의 조건이 되는 공간과 시간의 그물망을 새로이 짜고자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사실 상당히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것은 체계에 접근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체력이 거의 바닥난 것을 느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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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을 약간은 버거움을 느끼며 지냈다. 그간 집중해서 보았던 작업들의 이미지, 말, 이야기, 그런 것들의 힘이 미처 다 소화되지 못했고, 많은 것들이 목 언저리에서 막혀 미끄덩거렸다. 나는 가끔 미술 작품이나 전시를 보는 것에 대해 힘에 부침을 느끼는데, 그건 아마도 이미지라는 것이 촉발하는 풍부한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은 그 자체로 대단히 기이한 역학으로 이미지를 쏟아 낸다. 그리고 그만큼 미술이라 불리는 것들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미지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미지 사이의 간격이 필요하고, 그리고 언제나 그것과 대조할 항목들이 필요하다. 때문에 이미지에 대한 가장 깊은 숙고는 그것을 직접 마주 할 때보다 여행을 떠났을 때일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여행 자체가 불가능해져간다는 위기감이 깊어지는 것은 그래서 늘 근심거리이기도 하다. 며칠을 쉬고 다시 전시장을 찾아갔다.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것 또한 다른 출입구가 될 것이라 믿으며.

삶에 맞서는 것의 반대에 놓이는 것은 아마 삶을 위한 발화일 것이다. 여기서 위한다는 것은 그것에 복무하거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체성을 마주한다는 의미다. 한없이 잘게 쪼개져 어떻게 해도 드러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틈으로서의 구체성. 그것은 이론의 역할이 아니라 픽션의 역할이다. 말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는 것이다. 시인들이 언어를 배열한다면, 미술가들은 사물의 몸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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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 위에 길이가 긴 직사각형 모양의 판이 놓여 있었다. 회색의 시멘트 가루가 덧발라져 있어서 표면이 거슬거슬했고, 강도가 무게를 이기지 못한 탓에 양 끝이 바닥으로 약간 처져서 둥그스름하게 굽은 등이 생겼다. 중간에서 약간 치우친 위치에 짓뭉개진 촛농 덩어리가 올려 있다. 그리고 한쪽 끝 모서리에는 사과 모양의 흰 촛농 덩어리가 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이 작고 작은 사과는 어떻게 바라보아도 균형을 잡지 못한다. 김지우는 이 작업에 끝사과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나는 제목을 보고 비로소 이 굽은 균형이 시간에 대한 것임을 생각했다. 시간은 늘 속도와 방향에 연관되어 정해지고 말해진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쏜살처럼 빠른, 강물처럼 느린. 만약 시간이 속도나 방향이 아니라 무게나 크기나 농도로 말해진다면 어떨까? 거기에는 시작과 끝이 같은 점에 놓여 있고 또 어김없는 반복이 약속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상상이 되진 않지만, 콘크리트 판의 끝에 매달려 있는 사과는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선풍기가 자신의 프레임에 묶인 실을 계속해서 허공에 띄우고 있었고, 그 실의 반대편은 단추에 묶여 땅에 붙어 있었다. 벽면에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나무 상자가 붙어 있다. 전면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뚫렸다. 이리 저리 살펴보는데 갑자기 기분 나쁜 경고음이 울린다. 재난을 알리는 클리셰같은 그런 경고음이었다. 김지우가 만든 전시장의 사물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되뇌지 못하던 무척 사소한 일상에서의 사건에 대한 감각을, 기억을 건드린다. 하지만 그것에 형상을 부여하려 하지는 않는다. 한켠에 인쇄되어 놓여 있던 작가 노트에 눈길을 끄는 문장이 있어서 적어 두었다. “이런 짧은 소스라침은(…)그런데 과연 이것이 공포나 불안의 순간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그보다는 삶에 잠겨 있던 시간 혹은 공간의 단위가 하나로부터 수없이 뻗어 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다.”

시작은 언제나 사물에 대한 관찰이다.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사물이 암시하는 시간을 엿보고, 그로부터 사물의 관계가 유발하는 미묘한 긴장과 사건, 요구가 생겨난다. 규칙은 새롭게 조정될 여지로 남는다. 김소정의 전시장은 수다한 조각들이 등장인물처럼 놓여 있는 무대의 풍경이다. 관객은 그 사이를 자율적으로 거닐며 나름의 이야기를 구성하도록 요청받는다. 이 공간이 무대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사물의 존재감이 노골적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데, 말하자면 조각의 명령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서사적 주체를 예고하는 것 같다. 김소정의 조각이 이야기를 요청한다면 홍자영의 2채널 영상 playgraphy는 사물이 요청하는 신체의 움직임에 대해 다룬다. 도심 속 운동장으로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무대에 오르듯. 각각은 저마다 흰 손수레나 긴 천 등을 가지고 있고, 손에 쥔 사물에 따라 그들은 어떤 안무 동작들을 수행한다. 홍자영은 사물에 의한 이러한 안무를 스스로 ‘놀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공연에는 관람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안무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먼 거리에서 망원렌즈로 줌 인을 하여 기록한다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시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 시선은 사물 세계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투민의 전시장에는 말 그대로 저 홀로 움직이는, 명령이 입력된 기계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조각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사물의 춤은 종종 인간의 신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매혹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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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생각을 품고 다닌 오랜 시간 동안, 그 생각에 마음을 쏟을 때면 늘 한 소설에 대한 상념이 일렁였다. 그 소설이란 10여년도 더 전에 읽었던, 이미 반세기 전에 쓰인 최인훈의 회색인인데, 사실 딱히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로서는 독고준의 저 깊은 고뇌의 필연성과 인물 자체가 상징하는 선택이 어떤 급진성을 뜻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즈음의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어떤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말하자면 주어진 모든 조건들 중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내가 부정하는 자리를 인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혹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무너지듯 깨닫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통의 이유를 가늠할 수 없이 고통이 스몄고, 그것을 형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성에 낀 눈은 바깥을 볼 줄을 몰랐다. 이는 독고준이 처한, 이데올로기가 경합하는 역사의 거대함에 비할 바 안 되는 매우 개인적인 상황이었지만, 현대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미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개인에게 선택을 요구한다는 생각을 하며 종종 그 시간을 곱씹어보곤 한다. 마크 피셔가 당대 자본주의의 작동을 폭로하기 위해 개인에게 발현되는 병리 현상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다. 여하간 내가 이러한 병에서 차츰차츰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최인훈의 소설이라고까지 말하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분명 그것이 나에게 생각의 운동성과 방향에 실마리를 주었다고는 할 수 있다. 아니, 질문의 방식을 남겨주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무엇이 가장 급진적인가? 우리가 이끌려 가는 세계의 모델에 대해서 바틀비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면, 상황주의자들이 오류를 내기를 시도했다면, 독고준은 그 질문에 뒤따르는 나선형의 상념을 이어나간 인물이다. 나는 이제 그 상념을 일종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완전히 다른 삶의 지평을, 윤리를,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퀑탱 메이야수의 말을 빌자면 “법칙에서 벗어나고, 권리상(en droit) 예측 불가능하고 모델화할 수 없는 궤적”으로서의 바깥의 세계, 요컨대 허구를 위한 방법으로 말이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현실정치의 구호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일종의 미학의 자리로 여긴다. 물론 이 둘은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당대의 풍경 안에서, 주어진 감성 안에서 이 둘 사이의 먼 거리를 교신시키는 주파수를 찾고 증폭시키는 것은 늘 누군가의 임무로 남겨져 있다. 상념이란 대개 손에 쥐어지지 않고 흩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따라 걷던 몸의 기억은 내가 나의 삶을 운영하고 세계를 구성하는 관성으로 남는다. 즉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표어가 아니라 수행적 힘을 가진 명령, 행위의 규칙이고 운신의 폭이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물질적인 것이며, 공간과 나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고,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따져 묻는다. 나는 늘 그러한 수행적 힘에 각별히 마음을 쏟게 되는데, 별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것만을 통해 오직 내가 정당하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한 상념의 여울 속에서 긴 겨울을 보내야 했던 것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대해 전전긍긍하는 어떤 마음들을 다시금 이해해야만 해서였다. 그 마음은 “미래를 계속해서 사용했다”라는, 불안과 낙관과 무력과 희망이 뒤섞인 짧은 문장에 일시적으로 모였다. 결코 가벼운 말은 아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의 근저에는 공포가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에 그 공포는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겠지만, ‘미래 없음’이 뜻하는 바는 내딛어야 할 다음 번 발걸음을 위한 공간이 온통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어둠뿐이라는, 말하자면 선택 자체가 부재한 ‘공간 없음’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에 맞서 스스로 “언제나 영문 모를 것”이었던 “미술을 한다는 것”에 대해 숙고한다. 미술이 하나의 방법이라면, 그럴 수 있다면 이라고 굳게 가정한다. “계속해서, 의연하게” 없는 것을 응시하고자 한다.


 

김보원, 6 Landscape of Virtual Reality, 2018, Oil and acrylic on fabric, 239 x 143 cm
강현영, 바리케이드,2018, 타일, 가변 설치
곽지원, 전시 전경
김소정, 최소한의 거리유지, 2018, 가변크기, 나무, 도어스토퍼, 마사지공
김지우, 끝사과, 2017, candle, cement powder, variable demensions
오지선, 이어그리기, 2018, 소포지에 마카, A4 20장, 8장
이규진, 모자이크맨, 2018, animation, 1’ 46“
이정빈, 손발 Ⅱ Hands and Feet Ⅱ, 2018, 130.3 x 89.4 cm, oil on canvas
이주연, 골든 위크, 2018, 23’ 06”, single channel video
정하슬린, FittingHole, 2018
주보람, Perfect square, 2018, 캔버스에 네임펜
차현지, 3.305785m^2 The perfect failure(완벽한 실패), unstable/performance video and installation, 3 channel video, 2018
최윤정, 모의법원 , 2018, 싱글채널비디오
투민,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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