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 Hanbum

Writing

집을 무너뜨리고, 집을 짓기 위하여

월간미술 2020년 7월호에 수록.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핸드폰 사진첩을 열었다. 1년 전 여름 즈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한참동안 화면을 스크롤하다 보니, 놀라우리만큼 그득하게 쌓여 있는 사진들이 새삼스러웠다. 스치면서도 돌아보지 않을 이미지들. 기억도 아닌 것들이다. 발밑이 쑥 빠지는 듯한 무기력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오늘이란 것은 또다시 무작정 쌓여만 갈 것이고 내일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뭔가가 바뀔 거란 기대를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발밑이 없다는 불안을 틀어막는 것은 아마 촬영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의 몸의 감각과 저장소에 사진이 쌓여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숫자일 것이다. 데이터베이스가 구조화하는 세계의 감각이란 그런 것이다. 무한해 보이지만 빠져 나갈 다른 길이란 없다. 순차(sequence)가 없다. 순차를 구성하지 못하는 몸은 끊임없이 현재를 유예하고,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이 닿지 못하는 공간에 다다를 도리가 없다. 온갖 모양의, 속도의, 강도의, 크기의 흐름이 서로 겹쳐져서 세계를 구성하고, 그 유동성의 총체를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안가로 밀려온 사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거기에는 기하학적 무늬의 모래 언덕과 둥글게 닳은 조개껍질, 그리고 종종 편지가 발견되곤 했지만 이제는 온갖 것들의 이름이라 할 쓰레기가 해변을 덮고 바다 자체를 압도한다. 적절하게 폐기되지 못하고 되돌아온 쓰레기는 파괴된 자연의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회복할 수 없는 불능을 암시하는 흔적이기도 하다.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린 쓰레기가 암시하는 불능이란, 풍경을 구성할 수 있는 우리의 인지 능력과 이를 통과해 미래를 가능하게 할 윤리를 탐색하는 비평적 작업이다.

작년 여름의 사진을 뒤적거렸던 건, 류블라냐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 남반구의 성좌: 비동맹의 시학을 되짚어보기 위해서였다. 연대의 홀씨는 이 전시에 포함된 아카이브의 일부를 선보이고 있었다. 남반구의 성좌: 비동맹의 시학은 미술관이 자리한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가 속했던 유고슬라비아의 미술사를 서유럽/북미와 변별되는 독자적인 맥락에서 서술하기 위한 미술관의 진중하고 기나긴 연구 프로젝트 중 일부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남반구의 성좌: 비동맹의 시학은 유고슬라비아와 제 3세계와의 관계, 특히 문화적 관계의 유산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그것은 ‘세계화’와 ‘전지구’라는 이름아래 뭉뚱그려진 실재적 흐름을 가시화하며, 자기 자신과 미술에 대한 다른 해석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역사 쓰기이자 언어의 발명이었다. 과장하지 않고, 수사로 현혹시키지 않고, 오직 역사적 진실을 구축하기 위해, 이 작은 미술관은 발굴된 사료와 예술 작품의 배열을 통해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연속성을 담담하고 치밀하게 조직하고 있었다. 미술관은 자기 자신을 구성한 내적 힘을 추적하고 또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다.

베니스 행 비행기 표를 사 놓고는 끝내 타협되지 않던 찝찝함과 아쉬움에 과감히 류블라냐로 향했던 것은 되돌아보면 나에게 미술이란 무엇인지, 내가 지지하고 필요로 하는 미술이란 무엇인지를 스스로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선택이었다. 20세기 중반 제 3세계를 중심으로 시작된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이라는 개념, 역사, 프로젝트, 혹은 힘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여름이 오기 몇 달 전의 추운 겨울이었다. 작품에 대한 가치 규범을 어떻게 재조정할지, 미술사 서술의 적확한 모델은 어떠해야 할지, 미술의 정치적 실천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인지 묻는 그간의 나의 질문에 대해 비동맹운동은 이를 총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프레임처럼 보였다. 비동맹운동을 역사로서 지금 여기에 도입하는 것은 당대와 간격을 두어야 할 시차, 그 시공간적 불화를 탐색하고 동시대성의 담론적 기능을 위한 비평의 방법 자체로 여겨졌다. 나는 강하게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충격은 ‘그런 세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나라는 주체, 우리라는 공동체, 사회의 기억과 국가의 지리적 경계선이 어떻게 임의적이고 편협하게 구성되었는지, 역사가 왜 하나의 시간만을 가지는지,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권력이 무엇인지, 앎은 천천히 뒤이어졌다. 그로 인해 내가 암묵적으로 따르던 믿음은 회의에 부쳐진다. 모든 판단을 일단 뒤로 물려야만 했다. 비동맹운동이라는 힘 안에는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제국주의, 인간중심주의와 남성우월주의, 개발과 발전의 추구 등 우리를 꽉 옥죄고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찔러대는 칼부림과는 반대의 미학이 있다. 나를 지탱하고 품어 온 집을 무너뜨리기, 그리고 우리를 지탱하고 품어줄 집을 만들기. 비동맹운동이 내게 속삭였던 어떤 주문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1960년 새벽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주인공 이명준이 바다 한가운데 뛰어들며 끝난다. 한국전쟁 이후 포로가 된 그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에 송환되길 선택해 인도로 향하던 배 위에서였다. 둘 중 하나라는 덫에 빠지길 거부하고 제 3의 세계를 찾아 나선 이명준이라는 인물은 비동맹운동을 전면화하는 형상이라고 해도 좋다. 또한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 문화적 자율을 주창했던 민중과 지식인들의 형상이고, 오늘날 비판을 수행하는 예술가들의 성좌이자 전시 연대의 홀씨가 (비동맹운동의 당사자가 아닌) 한국의 한 예술 기관에서 열린 이유를 강변한다. 바깥을 향한 사유 자체가 어렵기에 더 긴급하다. 하지만 이 유령 같은 역사는 그저 호명한다고 해서 제 몸을 내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치열한 글쓰기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이름이 가진 동시적이고 모순적인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대변할 것인지, 그것을 드러낼 적확한 방법론과 서사는 무엇이어야 할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쓰기의 주체와 어떻게 마주하는지 등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섬세하고 곤혹스러운 작업이 요청된다.

연대의 홀씨는 전시와 함께 발간된 비동맹독본(현실문화)을 축으로 나선형으로 돌아 나온다. 비동맹독본은 77그룹부터 호찌민까지 총 78개의 용어가 가나다순으로 나열된 일종의 용어집이다. 하나하나의 항목은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비동맹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특정 범주와 관련되지만, 분류되거나 시간 순서에 따라 전개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의 개념, 사건, 인물에 모든 범주의 문제가 동시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그 자체로 비동맹운동의 총체가 되기 위한 기획처럼 보인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재구성해보게끔 한다. 그 필연성은 아마도 비동맹운동이 그저 지나간 시대의 흥미로운 잔해로 뒤적여지지 않기를, 외워야만 하는 교과서적 지식이나 교양으로 다뤄지지 않기를 바라는 엮은이들의 입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간에 놓인 요구는 만만치 않다. 이 책은 끊임없이 비동맹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순간들을 찾아내고, 흩어져 있던 여성들의 움직임을 일으켜 세우고 지금 여기 전해지지 않은 언어를 불러낸다. 전지구적 차원의 거시적 프로젝트를 재구성하려는 동시에 현재의 우리에게 관여된 미시적인 억압과 규율들을 내파하는 힘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이 책은 비동맹운동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로 지금 여기에 도입되기 위한 밑거름이 되고자 하며, 그 중요한 한 발을 내딛는다.

한편 연대의 홀씨는 전시라는 방법으로 비동맹운동에 다가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제 3세계의 국제 교류의 편린이다. 남반구의 성좌: 비동맹의 시학에서 선보였던, 유고슬라비아와 비동맹 국가 간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와 발리 마흐루지가 설립한 큐레토리얼 플랫폼 마지막 10년의 고고학(Archaeology of the Final Decade)의 기획 유토피아 스테이지 중 두 개의 파트가 전시된다. 유토피아 스테이지의 한 파트인 시라즈-페르세폴리스: 아카이브의 발굴은, 1967년부터 1977년까지 개최된 시라즈-페르세폴리스 축제의 면면을 보여주는 사진과 영상 등의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총 7개의 에피소드로 이를 재구성한다. 발리 마흐루지는 이 행사가 “특수주의와 문화적 차이, 그리고 타자성의 원칙을 지지했음에 주목”하고, 그 가치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며 다시 회복되어야 할 윤리로 제안한다. 이 아카이브는 식민주의와 문화적 헤게모니를 해체하기 위해 지역의 삶, 예술의 생명력 그리고 그것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온갖 소리와 움직임이 뒤섞였던 강렬한 시공간 속 무대의 추체험을 가능케 한다. 특히 1972년의 축제에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향하는 지식의 역전파’를 시도한 기획은 급진적 예술의 전 지구적 교류, 즉 ‘유산과 빚’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중요한 사례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아카이브 전시와 함께, 연대의 홀씨의 나머지 공간은 오늘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시각 예술가들의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비동맹운동을 역사로서 도입하려는 기획을 윤리를 탐색하는 쓰기(이미지를 발견하고 서사를 재구성하기), 이를 통해 현재에 치열하게 육박하고 그것과 불화하기 위한 실천의 재생산이라고 이해본다면, 여기서 다루어볼 수 있는 작업은 손에 꼽는다. 송민정의 (2019)과 차재민의 의자 위를 걸으며(2020)가 응시하는 것은 여성 혹은 노동자라는 특정 주체가 놓인 현실의 조건, 비자발적으로 참여되었고 속박될 수밖에 없는 억압의 투명한 작동이다. 송민정은 이 힘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권력적 폭력임을 폭로하기 위해 서로 다른 시공간 속 네 여성의 대화 그려낸다. 이들의 목소리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공고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적 현실에 동시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눈발 날리는 잿빛의 탁한 하늘에 못 박힌 현실에 맞서며 스스로의 몸이 생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해 협의하고 요구한다. 차재민은 스타디움 청소노동자들의 숙련된 육체노동의 스펙터클을 그들 사이에서 내밀하게 공유되는 행동요령의 내레이션을 병치함으로써 무너뜨리고자 한다. 시스템의 요구에 순응하고 적응한 몸짓이지만, 목소리는 그 구조 안에서 시스템을 전복시킬 불복종의 언어적 형태를, 불화하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것은 끝없이 반복될 것 같은 원형 경기장에서의 노동과 경합의 구조에서 이탈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하는 일이기도 하다. 윤지원의 무제(홈비디오)(2020)는 시간을 합성하기 위한 일종의 신디사이저 같다. 가만히 흘러가는 일상을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하며, 문득 그 세계의 한 귀퉁이가 이미지로 촉발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과거와, 기억과, 영화와, 이야기와, 이미지와 단숨에 이어지고, 그렇게 이 영화적 작업은 현실에 여러 호흡과 진동을 품어 나가며 현실의 단일한 주파수를 희미하게 희석시킨다. 하나의 긴 호흡 안에 여러 다른 길이의 호흡을 숨쉬게 하고, 하나의 긴 주기 안에 서로 다른 진동이 동시에 일어나도록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상이라는 외피를 두른 세계의 무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결을 새긴 힘의 방향대로 세계를 하나씩 쪼개어 보고 다시금 가지런히 배열하는 작가의 눈과 손일 것이다.

파트타임스위트의 TOLOVERUIN(2017)이 보여주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과 소통의 어려움이다. 화해할 수 없는 그 간극에서도 그러나 두 신체는 여전히 사랑을 발명한다. 사랑의 행위는 기술과 회로에 오류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의 작가들에게 정치는 점점 더 선언과 연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외부의 거대한 형상이 아니라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현실의 권력과 그로인해 상실된 주체성이다. 모든 불가능성에서 시작하는 몸들. 각자의 몸을 회복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긴급할지도 모른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각자의 크기를 가진다. 집의 크기와 모양을 따져 물을 것이 아니라, 집을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그 힘들, 결국 바깥이라는 한 방향을 정향하는 여러 다양한 힘들을 찾아내야만 역사는 다시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