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전시
처음 내게 전시 기획 요청이 왔을 때, 먼저 의아했다. 나는 전문적인 전시 기획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와 얽혀 있는 많은 일들(그것을 보고 글을 쓴다거나, 그것에 관한 책을 만든다거나, 그것에 참여해 강의나 대담을 한다거나)을 하지만 그건 전시 그 자체를 만드는 것과는 무관한 활동이다. 전시라는 것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만들어 가고 있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그런 일을 직업적 정체성으로 의식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건 언제나 전시의 외부임을 자각한다. 전시의 엔지니어링을 아는 것과 그것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의 너비만큼 전시 기획 요청은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너무 섣부르게 선을 그어 거부하기보다는, 나는 내게 던져진 그 엉뚱한 상황을 며칠간 즐겼다. 불현듯 전시의 의미에 대해서 숙고해보게 됐고, 인상 깊이 기억하는 전시들, 전시의 기획자들을 돌아보게 됐고, 내가 해오던 일, 할 줄 아는 일이 어떤 잠재성을 가졌는지를 되물었다.
내가 존경심을 품은 몇몇 뛰어난 전시 기획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전시가 매우 특수한 사건을 위한 인공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진력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큐레이터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바로 그 사건이 가능하게 하는 조형적 역량을 가지고 있고 또 끊임없이 훈련한다. 그런데 내가 그간 그들을 살피며 알게 된 것은, 이 조형적 역량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비평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은 작품이 잘 표명하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는 불투명한 얼굴을 깨워 내어 그것을 조형의 재료로 삼는다. 전시 기획자의 조형적 능력이란, 작품이라는 사물을 이러저러하게 배치하여 그럴듯하기 이어붙이는 모자이크 같은 것이 아니라, 작품의 어떤 순간들을 붙잡고 다독여 리듬을 상상하는 역량이다.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순간들의 뒤죽박죽 함과 시끄러움을 모종의 운동으로 형성해 놓기란 아득히 어려운 일인 것이고, 나는 그런 작업에 대해 경외해 왔다.
하루아침에 내가 그 조형적 역량을 가질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작품을 다루는 일’이라는 측면에서는 내가 해왔던 작업과 또 그렇게 멀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는 작품의 그 숨은 얼굴을 글이나 책과 같은 형식으로 다루는 방법을 보다 의식적으로 해왔을 뿐이다. ‘일’은 비슷하지만 전문적인 ‘기술’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는, 큐레이터가 작품 그 자체를 다룸으로써 작품의 일시적인 장소를 만든다면, 나는 작품을 다룸으로써 작품이 없는 장소를 만든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작품에 관여하는 시간성, 그리고 다루는 허구의 양태가 완전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큐레토리얼’이 작품을 다루는 기예에 관한 것이자 그 기예의 미학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일어나는 담론이라면, 그건 단지 전시라는 형식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큐레이터는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큐레토리얼에 참여한다는 것이 보다 적확한 이해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나는 큐레이터와는 다른 기술로 큐레토리얼에 참여해 왔다. 전시의 관습에 있어 내 역량이 어떻게 겹쳐 있고 어긋나 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내가 전시를 기획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됐다. 무언가는 포기하고 무언가는 더 활성화함으로써. 포기할 것이 큐레이터의 전문적인 조형 역량인 리듬으로 충만한 시공간이라면, 활성화할 것은 작품의 깊숙한 곳에 파묻힌 얼굴을 끌어내어 외부에 놓아두는 비평적 과정이다. 그리고 요즘의 관행에서 후자는 쉽사리 건너뛰어 버리는 단계이기도 하다.
참여 작가 모두와 처음으로 모인 날, 나는 먼저 그들에게 기획자로서 내가 가진 한계와 특수성에 대해서 설명했다. 나는 전문적인 전시 공학을 훈련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획자가 아니며, 전시 기획자보다는 편집자가 작품을 다루는 방식으로 전시를 만들어 나가보려 한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번 전시에서 시도해 보고자 하는 것은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가 아니라 작품에서 숨은 얼굴을 끌어내 사물과는 다른 존재 방식으로 가시적이게끔 놓아두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건 작품을 ‘이해’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일이다. 이해하려는 욕망 없이 다가가 보고 다가간 만큼을 말해보는 기획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내가 작가들에게 제안한 것은 생산이 아니라 다가감 이었다. 이런 제안을 할 때, 나는 작품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편집자가 잘하는 것은 작품을 안정화 시키기보다는 분탕 쳐 뿌옇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생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야기를 불러 이끌어내어 사람들이 보게끔 어딘가에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이라는 사물이 우리에게 비가시적이게 되는 암묵적인 시간을 상상하는 일에 더 애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건 전시를 빌미 삼을 뿐 책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책이 아닌 책’이라는 게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른 채여서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모두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래서 작품을 사이에 둔 대화가 시작됐다. 서신을 종종 주고받았고, 네다섯 번씩 만나며 5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첫 모임에서 나는 2작가들에게 아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글을 많이 쓰게 될 가능성이 큰데 괜찮냐고 물었다. 글쓰기는 괴롭고 어려운 일이니 양해를 구해야 했다. 다만 우리가 써야 할 것은 작품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작업에 결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생각하는 것, 작업의 어떤 순간들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7명 작가 저마다 책이 하나씩 만들어져 전시장에 놓였다. 전시장이 가장 우위에 있는 결과물이 되는 제도에서 전시와 함께 생산되는 텍스트는 대개 전시장을 위해 봉사하는 부가적인 것으로서 기획된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부연하거나 설명하거나 보완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건 글쓰기의 역량에 대한 숙고가 결여된, 텍스트를 그저 정보를 전달하는 운반체로 여기는 편협함이라고 종종 생각했다. 진정한 글쓰기는 작품의 사물성과 경합한다. 그러니 나의 제안이 충분히 의미 있으려면, 내가 그들에게 의미나 이유를 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작업의 시간을 함께 방랑하며 언뜻언뜻 비치고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들을 의미심장한 흔적으로서 붙잡아보는 모험 같은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 대화로 이끌어가기란 대단히 어려웠지만, 무엇보다도 정말로 모험하는 것 같아서 즐거웠다. 글쓰기는 작품에 관여하는 이들이 작품에 대해 함께 방랑하게 할 수 있는 특수한 방법이고, 이것은 전시에서 새로운 틈을 벌여 준다. 거기서 사물은 쉬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게 된다.
돌이켜 보건대, 질문의 책은 작품의 시간에 글쓰기가 도입되며 가능해지는 전시는 무엇일지에 대한 상상이었다. 작품이 숨겨둔 얼굴, 지나갔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 사소한 흔적, 허구를 불러오는 주문이 바로 글쓰기다. 그러한 글쓰기가 이루어지면, 작품은 더는 물리적 공간에 자리한 물질적 사물로만 국한하지 않게 된다. 나탈리 레제의 전시(L’Exposition)가 바로 이러한 문학적 실천인바, 그 자체로 전시인 이 책을 들추면 가까스로 통제할 수 있을 뿐인 작품에 관한 거의 모든 순간들이 쏟아져 내리고 그 쏟아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레제가 “비밀스러운 유기”1라고 표현한 그 순간들의 집합은 결국 작품의 장소를 형성하고 작품의 의미에 대해 진술하므로, 글쓰기가 하나의 전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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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전시, 봄날의책, 2024, 99쪽. ↩